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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망명 비화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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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망명 비화
                                                    전 재 혁 작성


< 목차 >

*  이연길과 황장엽·김덕홍
*  만남-망명전야-망명결행
*  최초로 공개되는 망명 주역 이연길 회장의 기록
*  망명 전 대화록
*  황장엽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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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연길과 황장엽·김덕홍

󰂏이연길. 그는 누구인가.

황장엽·김덕홍 두 분의 망명은 당사자의 애국적 민족관과 이연길 선생의 민주통일의식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 이었다.
1927년에 원산에서 출생하여 덕원공립농업학교와 성균관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한 이연길은 해방 후 독립비밀결사였던 양호단(養虎團)에 입단하였다. 양호단은 청산리 대첩에 참여했던 김성(金星)장군이 조직한 청년단체인데 함경도 지역에서 대공투쟁을 하다가 서울로 본부를 옮겼다.

1945년 10월에 월남하여 양호단이 독립촉성 서북 사무국, 동북동지회,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등으로 변천하는 동안 이연길은 줄곧 간부로 참여하여 좌익세력과의 투쟁에 앞장섰다. 그 후 국방부 제4국 특별훈련소에서 유격과정과 정보학 과정을 수료하고, 국방부 제4국 정보과에 근무하다가 대북관계를 담당하는 통일사에서 총무부 차장직을 맡아 일했다.

6.25가 발발하자 미8군 스츄어드 첩보대 수석 정보관으로 있다가 `51년부터 친형(兄)인 이지영(李志寧)대장이 이끄는 미 극동사령부 K.L.O 해상고트대(海上Goat隊)에 몸담고 서해지역에서 첩보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이지영 대장이 구월산 유격대와 유착하여 미군측과 마찰을 빚었다하여 직위해제되자 이연길이 후임 대장이 되어 생사를 건 활동을 하였다.

이연길 대장이 이끈 ‘고트’대(隊)는 6.25 당시 황해도 초도에 기지를 두고, 인민군 탄약고 파괴, 적 동향파악,  폭격 목표지점 첩보 수집 및 폭격 결과 점검, 인민군 간부납치, 기습작전, 적 경비정 및 중국정크선 나포, 소련-평양간 케이블 선 도청공작 등의 활약을 하였다.

전후에는 잠시 언론계에 몸담고 있다가 동원기계상사를 경영하면서 원산시 명예시장과 원산장학회 초대 이사장 직을 맡았다. 1978년부터 현재까지 이준열사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사단법인 대한민국 건국회와 실향민 중앙회 부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직을 맡는 등 통일안보 관련 단체에 기여하였다.

1990년부터 러시아에 있는 전 북한정권 고위인사들(이춘백 중장, 황성복 중장, 장철 대장, 이세호 중장, 박영빈 조직지도부장, 강상호 내무상, 허진 연대장·6.25때 남침개시 신호탄 쏜 사람)과 접촉하면서 통일사업과 탈북자 문제에 대해 협조를 구하면서 지금도 생존해 있는 분들과는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1993년 KLO출신과 구월산 유격대, 서북청년단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북한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전위단체로「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現 북한민주화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북한의 인권회복을 위한 국제적 여론을 환기시키고자 북한의 망명인사로 구성된 해외단체인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과 함께 4차례나 공동으로 국제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연길 회장은 북한노동당 비서이며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자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황장엽 선생과 함께 북한민주화를 통한 북한동포 구출과 평화통일 달성을 위한 민족운동을 하기로 뜻을 함께 하고 황장엽 선생의 망명을 돕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산을 털어 탈북자의 구출을 위해 헌신하는가 하면 북한의 핵 물질 생산기지에 관한 정보를 확보하는 등 민족에 대한 열정과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남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해왔다.

󰂏 황장엽·김덕홍
지난 1997. 2. 12.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여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황장엽 노동당 비서는 1923년 평안남도 강동에서 출생하여 `41년에 평양상업학교 졸업하고, 일본 츄우오(中央)대학 야간 전문부 법과를 나왔다. `46년에 조선로동당에 입당하고, 1949~1953년 소련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유학하고 온 후 `54년에 김일성 종합대학 철학 강좌장을 지냈고, `65년에 김일성 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1972년부터 11년간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냈고, `79년에는 조선로동당 과학교육담당비서 겸 주체사상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84년에는 조선로동당 국제담당 비서, `93년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위원장, `95년 국제 주체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다가 려광무역연합회사의 김덕홍 총사장과 함께 망명하여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고문(현 민주화통일협의회), 북한정책연구소 이사장과 탈북자동지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황장엽 선생은 이북에서 주체사상을 창시하고 이론적으로 발전시킨 주역이며, 오랜 기간 북한의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맡았고, 당의 외교분야를 담당한 북한의 대표적 지식인이다. 황선생은 “나의 주체사상은 통치자의 이기주의 때문에 독재권력 강화에 악용되었다”며 개탄하고 있다.

민족의식과 평등사상을 지니고 있는 황장엽 선생은 북한 땅이 대를 이어 충성을 강요하는 왕조체제가 되는 모습에 엄청난 심적 갈등을 겪던 중 인민들이 굶어죽는 심각한 상황에서도 침략전쟁 준비만 하고 있는 김정일의 민족반역자적 모습을 보면서 “개인의 생명보다 민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신념 아래 또 하나의 조국 대한민국과 힘을 합쳐 북한 동포를 구출하고, 민주통일을 실현시키는데 기여하고자 가족과 친인척을 북한 땅에 남겨둔 채 망명을 결행한 것이다.

황장엽 선생의 조국은 민족이다. 조국의 북녘 땅에서 이상을 그리며 주체사상을 정립시킨 그는 오늘 날 조국의 남녘 땅 대한민국에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바탕으로 북녘 동포를 구출하고자 고심하고 있다. 망명 후 한국에서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이라는 저서를 내기도 하였다.

김덕홍 총사장은 59세되던 1997. 2. 12.에 황장엽 선생과 함께 망명하였다.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을 역임하였으며, 조선 려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 겸 노동당 국제부 산하 평화주체재단 이사장 재직 시 망명하였다. 려광무역은 노동당 국제부 산하 무역회사로서 외화벌이와 국제부의 재원 마련을 위해 중국 북경에 설립한 회사이다. 김사장은 망명이 결행되기까지 모든 역할을 대행한 황장엽 선생의 동지이자 친형제와 같이 가까운 부하이며, 이연길 회장과도 호형호제하는 사이이다. 

현재 ‘탈북자동지회’ 회장직을 맡아 수령집단의 독재성과 반민족성을 규탄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 만남-망명전야-망명결행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현재 북한민주화협의회로 개칭)의 이연길 회장은 공산권이 붕괴되고 중국 왕래가 가능해지자 북한과 조선족의 움직임도 파악할 겸 북한과의 사업도 모색할 겸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과 공동 개최하는 북한민주화와 인권회복운동의 발전적 전기를 마련할 방도도 찾을 겸 중국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5년 초에 내한한 ‘조선족실업가협회’ 이엽 부회장을 만났고, 그 해 봄에 이연길 회장이 중국에 들어가 이엽씨의 소개로 동 협회의 회장으로 있던 김철씨를 만났다. 김철 회장으로부터 조선족과 평양 측과의 교역계획을 들은 이회장은 남북한과 조선족이 함께 해 나가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연길 회장은 여기에서 북경에 나와있던 북한 려광무역연합회사 김덕홍 총사장 겸 노동당 국제부 산하 국제평화주체재단 이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김덕홍-이연길 두 사람은 앞으로 다른 사람 없이 자주 만나자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1995년도 봄에서부터 한 달에 서너 차례 이상 만나던 두 사람은 말이 통하고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다. 점차 대화는 남북한 문제와 통일문제로 옮겨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이연길 회장이 줄곧 염두에 둔 것은 김정일 정권의 전복과 이에 대체할 망명정부 수립이었다.

김덕홍 총사장은 북한의 전쟁노선에 대해 많이 걱정하였다. 여기에서 이연길 회장은 자신의 이력을 털어놓았다. 북민협 회장이라는 것과 북민협의 목표는 북한 민주화라는 것, 북한정권을 대체할 망명정부를 세우기 위해 장소를 물색 중이라는 것 등도 얘기하였다.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반공주의자 이연길 회장과 김정일 조직원으로 북경에 나와 있던 김덕홍 총사장은 이와 같은 교분을 나누면서 동지적 관계로 들어갔다. 만나는 장소는 북경 시내 호텔과 김덕홍 총사장 사무실, 이연길 회장 숙소 등을 이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덕홍 총사장은 황장엽 비서의 철학과 인생관, 조국관, 통일관 등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두 사람은 민족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흉금을 터놓고 얘기하였다. 김정일 독재체제가 붕괴되어야 민족이 살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뜻을 같이 하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김덕홍씨를 통해 황장엽 선생에게 보고되었다. 이연길 회장은 김덕홍 총사장과 망명정부가 수립되면 황장엽 선생을 정부의 수반 또는 최고위원으로 옹립하기로 하고 그 때까지 황선생은 평양에 남아있는 것이 좋겠다는데 의견을 같이하였다.(북한에서 ‘비서’라 함은 노동당 정책집행 부서인 비서국의 핵심 멤버를 지칭함)

1995년 겨울 이연길 회장은 북경에 있는 민가에서 황장엽 비서를 만나 한시간 반 가량 얘기를 나누었다. 여기에는 김덕홍 총사장이 배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황장엽 비서는 주체사상이 변질되었다고 개탄하면서 김정일의 전쟁정책과 도탄에 빠져있는 북한동포들에 대해 걱정하였다. 그리고 전쟁을 막고,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김정일 수령절대독재자를 무너뜨려야만 한다는 신념을 피력하였다. 자신은 북경에 자주 올 수 없으니 김덕홍 아우를 나 본 듯하고 의논해 달라는 주문을 하였다. 또한 남한의 주사파를 걱정하면서 자신이 저술한 문헌들을 참고하고 필요한 내용이 있으면 마음대로 사용하여 타인 명의로 발간하라는 말을 하면서 이연길 회장에게 주기도 하였다.

이외에 북한민주화촉진회의 회원과 요인들에 대해 물었다. “지식수준이나 사회적 위치에서 손색이 없는 사명감이 강한 핵심회원이 600여명 된다”고 대답하고, 북민협과 동지적 관계를 맺고 있는 해외의 북한 망명인사 단체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과 국내외 애국단체의 활동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황선생은 “그 정도면 된다.”라는 신념을 피력하면서 “우리가 힘을 합쳐 투쟁하면 앞으로 5년 안에 김정일을 무너뜨릴 수 있고, 민족을 구출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말을 남겼다.
이연길 회장은 금강산을 관광 자원화 할 것과 김정일 체제를 붕괴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점을 제안하면서 이를 위해 해외인사들과 힘을 합쳐 망명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하였다.

이연길 회장과 김덕홍 총사장은 중국 내에 건물을 구입하여 이를 거사 준비를 위한 안전가옥으로 사용키로 하는 등 양자간에 구체적인 계획이 이루어졌다. 자금은 이연길 회장이 대기로 하였다. 김덕홍 사장은 이러한 일이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자살을 결행할 독약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연길 회장은 1996. 7. 4. 오전 8시부터 약 10분간 북경 공항에서 멀지 않은 민가에서 김덕홍 사장과 함께 온 황장엽 선생을 다시 만났다.
이연길 회장은 황장엽·김덕홍 두 사람과의 접촉에 대해 북민협 몇몇 간부들과 의논하여 왔다. 특히 북민협의 상임연구위원으로 있었던 김모 남북문제연구소장(전 안기부 북한정보국장, 감사원 사무총장)과 많은 의논을 하였고, 황장엽 선생이 준 자료는 남북문제연구소에 줬다. 김모씨는 진행과정을 안기부에 얘기하였다. 안기부의 담당간부는 이연길 회장이 황비서의 거사의사를 전해주자 믿으려하지 않았다. 당시 안기부 담당 실장은 황씨를 만나서 사진을 찍게 해 달라고 이연길 회장에게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연길 회장은 안기부 간부에게 북한에 있는 골동품 피아노를 안기부에서 구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안기부 측은 이를 승낙하였다. 안기부의 담당 실장은 4만불을 준비해 가지고 1996. 8월 이연길 회장과 함께 중국으로 나가 김덕홍 사장에게 전했다.

그 후부터 안기부 간부는 중국에서 직접 김덕홍 총사장을 만나면서 직접 공작을 시도하였다. 이연길 회장이 없는 상태에서의 공작이 원활하지 않자 안기부에서는 이연길 회장에게 협조를 요청하였다.

1997. 2월 황장엽 선생이 일본에서 개최되는 주체사상 학술회의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안기부 측은 이연길 회장에게 황장엽 선생의 망명을 성사시키도록 부탁하였다. 이연길 회장은 황선생의 망명도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북한에 좀 남아서 북한체제의 변화에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국익에 더 큰 보탬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안기부 측의 요청을 받고 이연길 회장은 다시 생각하였다. 만약 황선생이 망명하지 않는다면 안기부가 교란전술의 일환으로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식으로 북측으로 정보를 흘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자칫 첩자에 의해 황선생의 활동이 북측에 노출되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황선생에게 망명을 종용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1997. 1. 28. 이연길 회장은 북경에서 황장엽 선생을 만났다. 이연길 회장은 황장엽 선생에게 “이번에 일본에 가셨다가 북으로 가면 다시는 외국에 나올 기회가 없어지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황선생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번 기회에 나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황선생은 “일본에서 어떻게 나오면 되느냐?”고 이연길 회장에게 물었다. “공작책 N(씨)과 의논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황장엽 선생은 결심이 선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북한에서 따라온 수행원(감시원)과 조총련계 동포들이 황선생을 둘러싸고 다녔기 때문에 결행이 불가능하였다. 안기부 측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되니 황선생은 망명을 일본에서 결행하지 못하였다. 황선생은 이회장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이회장 손바닥 안에 똘똘 말은 종이 쪽지를 건네주었다. 그 종이에는 “북경에 차를 꼭 대기시키시오.”라고 씌어 있었고, ‘꼭’자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이연길 회장이 북경에 당도하니 김덕홍 총사장과 안기부의 또 다른 간부가 “빨리 해라”, “아직 때가 아니다” 등으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이연길 회장은 김덕홍 총사장을 잠시 보자고 따로 불러 황장엽 선생의 메모를 전해 주었다.     
이 메모를 본 김덕홍 사장이 드디어 망명을 서둘렀다.

1997년 2월 12일. 드디어 역사적인 황장엽 망명이 결행되었다. 북민협 회원 중 모신문사 기자가 있었는데 이연길 회장은 이 사람에게 훗날 역사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잘 보관하고 있으라는 부탁을 하고 틈틈이 자료를 보관시켰는데 황장엽 망명이 결행되자 이 기자는 결국 축적된 자료를 사용하였다. 이로써 이연길 회장은 북한으로부터의 암살위협과 함께 안기부를 망신시키려고 언론 플레이를 한다는 비난과 오해를 받게 되어 괴로움을 겪었다. 이것보다도 더욱 놀라웠던 일은 자칫하여 망명이 아니라 간첩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황선생의 한국 행이 좌절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이연길 회장은 건강이 나빠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이연길 회장은 국내외로 거처를 옮기는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 최초로 공개되는 망명 주역 이연길 회장의 기록

󰊱 그 쪽 권력 깊숙한 곳에 이곳 사람 박혀 있습니다.

김덕홍을 만나는 과정에서 줄곧 염두에 둔 것은 망명정부였다. 나는 이미 김덕홍을 통해 내가 북민협 회장이라는 것, 북한 민주화가 북민협의 목표라는 것, 이를 위해 적당한 지역에 망명정부를 세우려 한다는 것을 밝혀놓은 상태였다. 김덕홍도 황비서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황비서를 평양에 남겨놨다가 망명정부가 수립되면 정부의 수반 또는 최고위원으로 옹립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망명은 이 모든 것이 여의치 않으면 마지막 수단으로 시도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망명 자체를 추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96년 7월에 들어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하였다.「평양잔류→중국에 거점확보→망명정부 수립→망명」이라는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사태의 추는 망명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 진원지는 청와대였다.

황장엽 비서를 1996. 7. 4.에 다시 만났다. 그는 이번에도 주체사상연구소 순방 길에 베이징에 들린 것이다. 만난 장소는 베이징 공항에서 멀지 않은 민가였다. 물론 황선생 옆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밀착 경호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미국에서 온 재미사업가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황선생은 이런 상황에서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돌아가는 분이었다. 그가 먼저 선수를 치고 나왔다. “어, 나는 이 미국에서 온 중요한 손님하고 조용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너희들은 저쪽 방에 가서 문닫고 조용히 있어라”라고 경호원들을 따돌리고 무릎이 서로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전쟁을 방지해야 합니다. 전쟁을 하면 민족의 수난이 돌이킬 수 없습니다.”라고 얘기하고 “각별히 유념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쪽(남한) 권력 깊숙한 곳에 이곳(북한) 사람이 박혀 있습니다. 특별히 경계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나를 만난다는 것을 극비로 해 주셔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더 캐물으려 해도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아무리 떼어놨다고 하지만 옆방의 경호원에게 신경이 씌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선생 자신도 신경이 쓰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만난 시간은 불과 10분간에 불과했다. 나는 황망히 방밖으로 나갔다.

그 다음날 김덕홍 사장을 베이징 21세기 호텔에서 아침 일찍 만나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았다. 그는 “지난 6월 15일 황장엽 비서 동지가 출근길에 평양에 있는 내 사무실에 들러 봉투에 든 서류를 꺼내보라고 하기에 내가 꺼내 보았다. 그 내용을 본즉 남한의 청와대 비서실장 김광일이 제보자와 나눈 대화록이었다. 김광일이가 한 말이 북한에 보고된 것이었는데, 대충 기억나는 내용은 ‘대통령이 큰일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박정희와 같은 운명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빨리 손을 써야겠다’고 걱정을 털어놓는 대화록이었다.
황장엽 동지께서는 이 문건은 극비서류로 분류돼 당 비서에게만 배포된 서류라고 했다.”고 말하면서 원자탄 보유문제와 관련 “북한이 원자탄이 5개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다. 원자탄이 문제가 아니라 전방에 배치된 장거리 포가 실제로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라는 등의 말을 하였다.

청와대 같은 한국권력 핵심부에 북한첩자가 박혀있다는 말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황장엽 선생이었다. 그가 그토록 당황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황비서는 이미 나와의 만남과 대화내용이 어떤 경로로든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평양사무실에서 김광일 청와대 비서실장의 대화록을 목격한 것이다.
따라서 그로서는 경악치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즉 청와대 비서실장의 대화내용이 송두리채 평양으로 보고될 정도면 자신들에 대한 정보도 이미 청와대에 박혀있는 간첩을 통해 김정일에게 보고될 공산이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김덕홍은 또 “안기부에도 이쪽 사람(북한 간첩)이 박혀서 매일 팩스로 첩보를 보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물론 나도 깜짝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알려진 것이지만 김광일 실장의 대화내용은 일본 체널을 통해 평양으로 흘러갔음이 밝혀졌다.

김덕홍과 나는 다시 머리를 맞대었다. 일단 중국에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데 의견을 함께 했다. 그리고 망명 같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가족을 중국으로 빼내오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김덕홍 사장이 전해준 가족상황은 황장엽 본인과 아내 박승옥(외국 교육도서 출판사 편집원), 아들 황경모(33세, 조선인민군 부대), 맏딸 김형직 사대교원(준박사), 둘째 딸 의학대학 연구사(준박사), 셋째 딸 의사. / 김덕홍 본인, 아내 박봉식(정무원 대외봉사국 재정처 지도원), 맏 아들 김문철(30세, 평양시 안전국 정치부 지도원, 맏 딸 김문희(32세,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둘째 딸 김명희(28세, 평양시 지하상점 판매원), 셋째 딸 김정희(24세, 평양시 해방산려관 부기원).

이 중 가장 신경이 쓰이는 대상은 황선생의 아들 황경모였다. 황선생의 외아들로서 아버지를 닮아 머리도 좋고 잘 생긴데다가 인민군 정치지도원으로 북한 내 여러 곳을 헤집고 다녔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황경모를 비롯한 가족들을 빼내는 것이 중요했다. 이연길, 김덕홍 두 사람은 가족들을 중국으로 불러내려면 호텔이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했다. 일단 호텔을 구입하면 외화벌이를 하겠다는 구실을 붙여 가족 등을 호텔에 취직시킨다. 물론 북측이 눈치채지 못하게 한 명씩 불러야 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상황을 좀더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극비 대화록 원문 그대로 옮겨 놓는다.(대화록 참조)

󰊲 돈 돈 돈

돈이 원수였다. 만일 나에게 돈이 많았다면 황장엽 사건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황비서가 가족을 버리고 이런 식으로 황망하게 서울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안기부가 사건을 틀어쥐고 제 마음대로 좌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사건이 막바지로 치닫던 96년 말 나는 그야말로 기진맥진했다. 황장엽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김덕홍 말대로 베이징 거점이 필요했다. 호텔 건이 수포로 돌아가자 우리는 오피스텔을 물색했다. “오피스텔을 사자. 오피스텔에 우리 거점을 차리고 일부는 임대를 주자. 그 임대료를 받아 우리의 활동비로 쓰자. 황경모를 비롯한 가족들을 데려다 사업에 투입하자.” 그런 계획이었다.

우리는 건물을 물색하기도 했다. 베이징 시내에서 좀 떨어진 조양공원 근처에 맘에 드는 건물이 있었다. 길쭉한 건물이었는데 깨끗했다. 건물 개조비 까지 합쳐서 총50만 달러면 될 것 같았다. 건물주와도 접촉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었다. 당시 환율은 지금보다 쌌다. 그러나 1달러당 800원만쳐도 50만 달러면 우리 돈으로 4억이다. 그런데 4억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것도 한 두 푼이 아닌 4억을.

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나는 90년초 대북사업을 시작한 이래 이미 돈을 숱하게 썼다. 일일이 계산은 안해봤지만 억대 이상은 가져다 썼을 것이다. 내 자랑 같아 쑥스럽지만 내 친구들은 나보고 돈을 적절히 잘 쓰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지금도 차 한잔을 마셔도 내가 돈을 내야지 남이 내면 무슨 신세진 것 같고 영 마음이 편치않다. 대북 사업은 사람사업이자 돈 사업이다. 중앙아시아에서 근근히 살고 있는 소련파 인사들, 하바로브스크의 헐벗은 벌목공, 그리고 베이징 북한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돈이 든다. 돈을 줄 때 쩨쩨하게 주지 않고 마음을 탁 열어놓고 집어줬다. 무슨 봉투에 담아 주는 게 아니다.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한 후에 항상 갖고 다니는 지갑을 상대방 면전에서 활짝 열어 보인다. 그런 다음 손에 잡히는 대로 한 웅큼 집어준다. “당신 돈 없을텐데 나눠 쓰자” 그럴 때도 있고 “냉수 마시고 이 쑤시는 척 하지 말고 내 성의니까 받아둬” 할 때도 있다. 그러면 상대방도 마음을 풀고 받는다. 일일이 치부책에 적어놓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충 계산해도 한번 외국에 나가는데 최하 300만원은 드는 것 같았다.
그 동안 돈은 주로 아내에게 의존했다. 아내는 의사로서 부산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돈이 모자라면 전화를 걸어 “돈이 좀 필요해서 그래. 돈 좀 보내 줘”라고 한다. 그러면 아내는 집에 돈이 없을텐데도 싫은 내색 한번 안하고 돈을 보내주곤 했다. 아내는 반공운동 한답시고 뛰어 다니는 못난 남편을 만나 오늘까지 고생이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갖다 쓰기를 벌써 몇 년째 했으니, 결국 못 견디고 아파트와 땅을 팔았다. 김덕홍을 만난 95년에는 제주도에 갖고 있던 땅(2천평)을 잡혀 돈을 빌려쓰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갖고 있던 아파트(39평)를 팔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제 또 이렇게 큰돈이 필요하다니, 어디서 돈을 마련한담. 나는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이것은 안기부가 본격 개입한 피아노 사건으로 이어졌다. 돈이 원수였다.

󰊳 야마하 2호

안기부는 내 일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법과 돈 그리고 정보, 어느 측면이든지. 예컨데 현행 남북교류법에 의하면 북측인사와 만날 때는 반드시 통일부에 신고를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일의 성격상 그럴 수가 없었다. 따라서 법적으로만 따지자면 안기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나를 구속할 수가 있었다. 또 안기부에 이 일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황비서가 전해준 ‘청와대 정보유출’, ‘안기부 내 고정간첩’같은 것은 국가안위에 관련된 사안이었다. 안 알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안기부는 처음에 우리말을 잘 믿지 않았다. 처음에는 우리를 잘 만나주지도 않았다. 아마 70줄에 들어선 노인들이 “황장엽과 얘기가 됐다. 황장엽이 망명하려고 한다.”고 하니까 잘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것이 진짜라는 것을 알게되자 해외공작을 담당하는 안기부의 N실장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실망스러운 것은 그가 공작의 ABC도 모를뿐더러 전혀 지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N은 공명심과 출세욕이 가득한 사람이다. 당초 황장엽 건을 N에게 털어놓자 그는 대뜸 “황장엽과 사진 한 장 찍으려 한다”고 했다. 아마 그 사진을 상부에 보고해 한 건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N의 공작행태와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는 피아노 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물개, 오사리 방석 등 베이징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사업이 하나같이 수포로 돌아가자 김덕홍은 어느 날 무릎을 탁 치며 “피아노가 있다”고 했다. 김덕홍에 따르면 북한에는 귀중한 골동품 피아노가 있다. 야마하 넘버2 피아노다. 넘버2 피아노는 일본 천황부인이 어렸을 때 치던 것인데 자신을 돌봐주던 유모에게 선사한 것. 그런데 이 피아노가 우여곡절 끝에 북한에 흘러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피아노는 오랫동안 북한의 안주교회에 비치되어 있었다. 김은 “이 피아노는 조국해방전쟁(6‧25) 당시 인민군에게 잡혔던 미군 포로들의 수기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서깊은 골동품 피아노”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피아노를 팔려고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알아보니 피아노는 골동품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여기 저기 알아보기를 며칠. 하루는 전화가 왔다. “피아노 살 사람을 찾았습니까?” 안기부에서 해외공작을 담당하던 N 밑에서 일하던 실무자였다. “아니, 아직 못 구했는데” 그러자 “그럼 우리가 살까요?” “좋지” 얘기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대한민국에서 이 피아노를 사줄 전주는 안기부 밖에 없었다. N은 자신이 골동품상을 가장해서 김덕홍을 만나겠다고 했다. N과 나는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N은 가짜 골동품상 명함을 지니고 갔다. 그런데 베이징 비행기를 타는데 N은 1등석을, 나는 이코노미석에 각각 타고 갔다. 당시에는 그저 “돈이 생기는구나”하고 기뻤을 따름이었다.

베이징 호텔에서 각자 방을 잡았다. N은 호텔 최고급 12층 스위트룸에 자리잡고 나는 8층 이코노믹 층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되자 N은 우리를 12층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양측 나이 차이를 감안하건데 처음부터 무례를 범한 것이다.

나도 기분 나쁜 것을 참고 일부러 와이셔츠와 슬리퍼 바람으로 김덕홍과 함께 12층에 올라갔다. 방에 들어가자 소파에 삐딱하게 앉아있던 N은 변변한 인사 한 마디 없이 돈 봉투를 툭 던졌다. 봉투에는 1만불이 들어 있었다. 지켜보던 나 역시 기분이 나빴으니 김덕홍은 말할 것도 없다.

김덕홍은 뒤도 안 돌아보고 문을 “쾅”닫고 나가버렸다. 북한은 연장자에 대한 예의 하나는 깍듯한 사회다. 또 북한사람들이 자존심 하나로 사는 사람들인데 그런 꼴을 당했으니 오죽 기분이 상했겠는가. 나도 슬리퍼를 끌고 나와 김덕홍의 뒤를 따르면서 김덕홍을 달랬다. “남한 놈들이 원래 돈밖에 모르는 놈들이니 자네가 이해하게”하고. 그리고 중국 고사에 나오는 한신(韓信)에 관한 얘기를 해 줬다. 한신이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치욕을 참고 동네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간 적도 있다는 것. 우리도 망명정부라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만한 수치는 참아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기분이 상한 김덕홍은 그로부터 24시간 동안 연락을 안했다. 그 만큼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애가 탄 N은 “김덕홍에게 내가 안기부 3인자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N의 실제 서열은 물론 그 아래다. 김덕홍에게 그 얘기를 전하자 “안기부 3인자가 저 정도니 남조선도 알만하다”고 비꼬기도 하였다. N에게 김덕홍이 던지고 간 1만불이 든 돈 봉투를 돌려주었다. 김덕홍을 간신히 달래서 이틀 뒤 다시 김덕홍과 N을 만나게 했다. N은 김덕홍에게 어물어물 사과를 했다.
“김선생, 지난번에는 내가 실례를 했는데, 좀 이해를 하쇼”하고. 그리고 N은 양복 윗 저고리 포켓에서 봉투를 두 개 끄집어냈다. 각 각 2만불이 있는 봉투였다. N은 봉투를 김덕홍에게 건네줬다. 4만불을 손에 쥔 김덕홍의 얼굴이 좀 펴진 듯했다.

󰊴 二人三脚

안기부가 피아노 사건을 계기로 본격 개입하면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우선 김덕홍-안기부-나 사이에 기묘한 二人三脚이 시작되었다. 안기부가 개입하기 이전까지는 게임의 구조가 비교적 간단명료했다. 황장엽 비서, 김덕홍 그리고 나는 ‘김정일 제거, 망명정부 수립’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위해 뜻을 같이 하는 동지였다.

그리고 황비서가 평양에서 코너에 몰리는 사정을 감안, 베이징에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정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일단 가족을 빼내 놓은 후 이듬해 4월 황비서의 외국 순방을 기해 망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기부가 개입하면서 이같은 목표와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우선 안기부는 나를 제쳐놓으려 했다. N은 일단 피아노 사건을 계기로 김덕홍과 안면을 트자 나를 제치고 김덕홍과 직거래를 하려 했다. 나는 담담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정보기관의 생리니까. 문제는 김덕홍-안기부 직거래가 잘 안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김덕홍과 N의 만남을 모른척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김덕홍은 서울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북경으로 오라고 자주 연락이 왔다. 그리고 “N이 이렇게 말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어오기도 했다. 아마 둘 사이에 얘기가 있기는 있는데 주파수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이때 황장엽씨가 평양에서 더욱 코너에 몰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96년 7월 북한노동당 이론지 ‘근로자’에 논문이 실렸다.
“주체철학은 독창적인 혁명철학이다”라는 김정일 명의의 이 논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최근에 우리의 일부 사회과학자들이 주체철학을 해설하는데 우리당의 사상과 어긋나는 그릇된 견해를 주장하고 있으며 그러한 견해가 대외에도 유포되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것은 황장엽을 겨냥한 논문이었다. 지난 5월 노동신문에 게재된 것은 노동당내 이론가들이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정일 명의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북한이 황장엽 비서를 숙청한다고 해서 반드시 총살을 한다던가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저 마주 오던 트럭이 황선생이 타고 있는 자동차를 덮치는 식으로 사고사(死)를 가장하면 충분했다. 평양의 황비서는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비서는 독약을 구해 달라고 했다. 김덕홍은 이 때 “황선생이 극약을 구해 오라고 했다. 그 정도로 황선생은 결심이 섰다. 이분의 생각은 공화국이 이래가지고는 안 되는데 자기 주장과는 반대로 나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독약 주문을 받은 나는 고민했다. 마치 총기를 소지하면 방아쇠를 당기고픈 충동을 느끼듯이 일단 독약을 지니게 되면 독약에 대한 유혹이 생기는 법이다. 이 점을 우려한 나머지 나는 나중에 황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 달 뱃사람들은 별을 보고 목적지까지 항해를 했습니다. 이 별이 잘못되거나 유성이 되어 없어지면 목적지까지 도달하는데  상당한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성자는 바로 이 별입니다. 가지고 계신 약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우회적인 표현을 썼지만 소지한 독약을 써서는 안된다는 간절한 내 마음을 전달한 것이다. 그러나 안기부는 고민하지 않았다. 김덕홍을 통해 독약 요청을 받은 N은 덜렁 독약을 전해줬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김덕홍이 요청한 독침까지도 구해줬다.

96년 하반기에 들어 황장엽 사건은 나의 당초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안기부는 초기에 일단 ‘황장엽’이라는 이름과 정보가치에 주목한 것 같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황비서는 주체사상을 만든 창시자였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안기부는 황장엽 망명이 지닌 국내 정치적 폭발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평양에서 좁아지는 황비서의 입지, 그리고 현장 지휘자인 N의 개인적인 공명심, 정보책임자인 권영해 안기부장의 의도, 그리고 정보의 최종 종착지에서의 판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게다가 불안한 이인삼각(二人三脚)은 미스테리 여인 K의 등장으로 더욱 복잡해져만 갔다.

󰊵 미스테리 여인 K, 그리고 거산(巨山)과 소산(小山)

내 기억으로는 K라는 여인이 등장한 것은 금강산 개발계획이 불거지면서였다.
96년 여름 경으로 기억한다. 극심한 외환 난에 시달리던 북한은 금강산을 개발해 달러를 벌자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금강산 개발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현대, 삼성, 대우 같은 한국의 내노라는 재벌들은 일제히 계획안을 냈다.
이 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다름 아닌 명성그룹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안을 북측에 전달한 것이 바로 K였다.

김덕홍은 K여인을 ‘김교수’라고 불렀다. 서울 시내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당 대학에 문의해 본 결과 “그런 사람은 없다”는 얘기만 들었다. 내가 아는 것은 K여인은 50대로 아직 상당한 미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무슨 회사의 고문직을 겸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던 차에 명성이 부도가 나고 사업이 어려워졌다. 또 북한도 군부의 반대로 금강산 개발계획을 포기했다. 그러자 K여인은 이번에는 H목사(서울 남서울 O교회)측이 북한에 밀가루 1만톤을 제공하고 싶다는 구실로 김덕홍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일단 김덕홍과의 약속 이행을 않은 것은 물론이고 만나자고 철석같이 해놓고도 번번히 약속장소에 나타나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미스테리 여인이었다.

권영해 안기부장은 98년 5월 검찰에서 북풍사건과 관련 “윤홍준 기자회견은 K여인이 주선했다”고 말했다. 황장엽 사건, 북풍 기자회견 처럼 안기부가 필요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안기부를 도와주는 K여인. 안기부의 외곽 브로커로 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문제의 K여인이 김덕홍에게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었고, 보도에 따르면 96년 9월 김현철은 열흘 간 베이징을 방문했고 현철은 박태중을 통해 김덕홍과 접촉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황장엽은 물론 중국에 있던 김덕홍도 김현철을 만난 사실이 없다.
혹시 김현철 쪽에서 K여인을 통해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황장엽 사건을 파악하고자 시도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안기부 보고를 다른 체널을 통해 확인코자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이 비선 조직은 황장엽-김덕홍-K여인-박태중-김현철로 이어지는 보고체계다. 이 라인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 문제에서 손을 뗐는지 조용해졌다.

황장엽 건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강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것 같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당시 한 발언을 자세히 살펴보면 “북한에 관한 한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는 발언을 자주 했다. 예를 들어 김대통령은 96. 8. 28. 이홍구씨를 포함한 신한국당 고문단과의 오찬에서 “북한은 지금 권력 분산현상이 심해 대단히 위험한 상태”라고 말했다.
또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0월 4일에는 “북한은 말기적 현상을 보이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황장엽 망명을 염두에 둔 발언 같았다.

정보는 힘이다. 그러나 그 힘은 정보 자체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정보에 대한 적절한 평가와 활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김대통령의 참모들은 정보의 획득에는 신경을 썼지만 정확한 평가와 활용은 미숙했던 것 같다.

󰊶 날개를 얻되 재난이 겹쳐 무용지물이 된다.

96년 11월-12월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선 황장엽 비서의 순방 일정이 잡혔다. 1월말-2월 중순 기간 중 중국 베이징과 일본 도꾜를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워낙 예전에 잡아놓은 일정이어서 북한 당국도 마지못해 외유를 허용하는 것 같았다.
나와 김덕홍은 긴장했다. 입안에 침이 바짝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아직 준비는 하나도 된 것이 없는 상태였다.
당초 베이징에 마련키로한 아지트도, 망명에 앞선 가족 도피도 해놓지 못했다. 이 무렵 황선생은 자신의 논문을 본격적으로 반출하기 시작했다. 아마 망명이 실패할 경우 자신이 그 동안 천착해온 사상적 전환의 증거물을 남겨놓으려 하는 것 같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자신의 논문과 글을 내 보냈다. 논문을 전부 합치면 아마 여행용 트렁크로 하나 가득 될 것이다.

김덕홍도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하루는 “형님. 남조선에는 용한 점쟁이가 많다는데 내 운세나 좀 알아봐 주쇼”했다. 한편으로는 우스우면서도 오죽 답답하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대로 점을 봐주기로 했다. 김덕홍은 1938년 11월 3일 인시생(寅時生)이다. 서울의 잘 아는 점쟁이에게 의뢰한 김덕홍의 운세는 다음과 같았다.
*격각살(隔角殺)이 있으니 어려서 존친(尊親)의 인연이 박하거나 일찍 생가를 떠나 생활하여 고독하고 또한 형제도 중도에서 점점 소원해지며 때로는 형죄(刑罪)에 접촉하는 일이 우려도 되는 살(殺)이 있는 명(命)이다.

*금성에 목기(木氣)가 많으니 토금운(土金運)에 목기(木氣)를 분산시켜 금(金)을 도우니 용기백배하여 성공하고 화운(火運)은 목기(木氣)를 덜어내고 금(金)을 제련(製鍊)하고 발전하며 수목운(水木運)에는 흉신(凶神)인 목(木)이 날개를 얻었으니 재난이 겹쳐서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는 명(命)이다.

김덕홍 사장과 나는 한자로 빽빽하게 적힌 점괘를 들여다보면서 함께 웃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점괘 안에 웃어넘길 수 없던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용기 백배해 성공하고 날개를 얻으나 재난이 겹쳐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혹시 점쟁이는 그때 김덕홍의 운세가 아닌 내 운세를 본 것은 아니었을까?

󰊷 기자와 정치인은 안됩니다.

“이회장, 폴김입니다.” 깜짝 놀랐다. 김덕홍 사장이었다. 12일 밤 9시 30분이었다. 이 때 나는 강남 집에서 KBS 9시 뉴스를 온 신경을 곤두세워 보던 중이었다.
“거기 어디요?”
“영사부 안에서 전화합니다. 내일 꼭 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알겠소. 가리다.”
전에도 그랬지만 우린 긴 대화가 필요 없었다. 무슨 돌발사태가 발생한 것일까. 그것보다는 생소한 영사부 안에서 어드바이스 해줄 사람이 필요하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또 왔다. N이었다.
“내일 북경에 가는데 같이 가시지요”
“좋소, 내일 아침 김포공항에서 만납시다.” 김덕홍이 다시 N에게 전화하였거나 안기부가 내 전화를 도청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6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택시 안에서 신문을 읽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베이징과 도꾜 특파원들이 황장엽 사건과 관련해 쓴 추측기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내심 “황선생이 서울로 올 때까지 언론들이 계속 이래야 할텐데”하는 생각을 했다. 김포공항 출국장에서 N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가 전화를 했더니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북경에 가지 말고 일단 다른 곳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랐지만 N의 부하 W가 하도 심각하게 얘기하는 터라 그러기로 했다.
공항택시를 타기 위해 걸어가면서 가판대에서 신문을 한 부 뽑아 들었다. 신문을 펼쳐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충격적이었다. 마치 큰 해머로 “꽝”하고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신문에는 1면 머리기사로 「인민이 굶어 죽는데 무슨 사회주의인가」「나는 이래서 귀순했다. 황장엽 자필 서신 본사 단독 입수 3-4면」이라고 대문 짝 만하게 쓰여있었다.

공작은 어렵다.
그러나 공작의 뒤처리는 더욱 어렵다.
특히 정보의 최종 사용자인 대통령과 정보기관이 일선 정보원과 다른 의도를 갖고 있을 때 그리고 언론이 틈새에 파고드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황장엽 사건이 바로 그런 사건이었다.

황장엽 비서가 망명할 때까지는 황장엽, 안기부, 나, 그리고 언론 4자는 서로의 입장을 접어두고 긴밀히 협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가장 부합한 것이니까.
그러나 일단 황비서가 12일 오전 10시 5분에 베이징 한국영사부로 걸어 들어오자 4자는 일제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제 각각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안기부는 ‘한보사태 뒤집기’를 노리고 있었다. 한보사태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 위기차원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때 진행 중이던 한보비리는 은행의 부정대출 차원을 넘어 김현철 영향력 행사-무능한 대통령으로 번지고 있었다. 따라서 안기부와 청와대는 ‘황장엽 망명’같은 메가톤 급 사건을 터뜨려 한보를 덮어버리려는 맞불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안기부는 이를 위해 황장엽을 독점해야만 했다. 이 사건을 철저하게 안기부 작품으로 만들고 그를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권영해 안기부장은 12일 아침 황비서가 영사부로 걸어 들어간 날 오후에 중앙일간지와 방송사 편집국장들을 안기부청사로 초치했다. 이 자리에서 권 부장은 ‘황장엽=안기부 작품’라는 점을 암시하는 한편 보도협조를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나 권부장의 이 같은 계획은 언론이라는 암초에 부딪쳐 좌초되고 말았다. 언론이 13일부터 황장엽 서신, 대화록 등을 차례로 공개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황장엽 독점을 꾀하려던 권영해 부장의 당초구상은 수포로 돌아갔다.

안기부, 언론, 그리고 나, 세 명이 황장엽 망명을 놓고 벌인 각축전은 결과만을 놓고 보면 그 누구도 완전한 승리와 완전한 패배를 거두지 못한 애매한 절충형으로 끝났다.
안기부는 소망하던 황장엽을 손에 넣는데는 성공했으나 언론의 발빠른 보도로 이를 정치적 목적에 활용하는데는 실패했다.
황비서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당초 꿈꿨던 것은 망명이 아닌 망명정부였다. 그러나 황망히 서울로 망명함으로써 망명정부의 구상은 빛이 바래져 갔다. 물론 평양에서 고초를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유일하게 재미를 본 사람으로 언론을 꼽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못한 것 같다.
언론은 손에 넣은 몇 가지 문서를 근거로 보도를 하기는 했지만 100% 진실을 파헤치지는 못했다.

나는 당시 모신문사 기자에 대해 심각한 배신감을 느꼈다.
당초 내가 모 기자와 본격적으로 접촉한 것은 지난 94년 북민협이 출범하면서부터다.
그 후 96년 5월-7월 김모 기자에게 황장엽씨 접촉사실을 조금씩 흘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만일의 사태, 즉 황비서나 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할 경우 누군가가 사건의 진상을 알려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 김기자는 북민협의 중앙상임위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사건의 기사화에는 엄격한 전제조건이 달려 있었다. 그것은 나의 동의와 황선생이 안전해진 다음이었다. 이 점이 걱정돼 나는 도꾜에 가기 전날에도 김기자를 대우빌딩에서 따로 만나 “절대로 넘겨준 문건을 기사화하면 안된다.”라고 신신당부했고 그 역시 다짐을 했다. 그가 약속을 어긴 것이다.
특히 그가 황선생의 논문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처사에 대해서는 아주 불쾌하다.

황선생이 쓴 <조선문제>를 비롯한 몇몇 글은 일반적인 학술논문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목표했던 조선민주인민공화국 망명정부를 염두에 둔 일종의 정강 또는 반북 이념을 설파한 것이지 일반적인 논문이 아니다.
이 논문을 두고 일각에서는 갖가지 루머가 나돌고 있었는데 차제에 의혹을 풀기 바란다.
그리고 나 역시 논문 관리를 잘못해 황장엽 선생에게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점을 이 자리에서 빌어 사과를 드린다.

97년 2월 12일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부로 망명한 황장엽-김덕홍 문제는 남북한과 중국 그리고 유엔까지 관여한 복잡한 문제로 비화됐다. 결국 황비서는 필리핀으로 이송돼 거기서 한 달여 지내다가 67일만인 4월 21일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다.

나 역시 감금 아닌 감금생활을 해야만 했다. 문제의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안기부는 나를 서울 모처 안가에 일주일 이상 머물게 했다. 그 후 부산으로 내려 갔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호텔 앞산에 오르락 거리는 일과 TV를 시청하는 자유 밖에는 없었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안기부가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은 “기자와 정치인을 절대 만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2월 18일에는 “일체의 비밀을 엄수한다”는 내용의 각서도 쓰게 했다. 아마 내부적으로 황장엽 망명=안기부 작품으로 다 해놓았는데 내가 나서면 곤란해 질까봐 그러는 것 같았다.

조롱 속의 새처럼 몇 달을 지내다가 안기부는 “해외에 나가 있는 것이 좋겠다”고 종용했다. 할 수없이 브라질과 미국에 몇 달을 머물러야만 했다.
아마 12월 대선을 앞두고 내가 양심선언이라도 할까봐 우려했던 모양이다. 브라질은 현금 200-400불이면 살인청부가 가능한 곳이다. 브라질에서는 안기부가 지정해준 호텔이 아닌 아는 사람의 집에 묵었다.
안기부는 “왜 호텔이 아닌 곳에 머무르는가”하는 짜증스런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당초 브라질로 떠날 때 내자(內子)에게 “만일 내 신변에 이상(살해 등)이 생기면 언론에 알려라”는 편지를 남겨놓기도 했다.

내 사무실은 안기부와 북한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북한은 간첩을 시켜 사무실 주변에 나를 협박하는 삐라를 뿌렸다.
또 안기부는 내가 운영하는 사무실을 뒤져 관계 서류를 모두 가져가 버렸다. 지난해 12월 18일 새벽 TV를 통해 김대중씨가 당선된 것을 보고 그 때서야 비로서 “이제는 한국에 가도 좋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망명 전 대화록

(1996. 3. 12. 화. 21:00-22:00)
김: “이회장! 중앙일보 3월 2일자에 이병화라는 국제 농업개발원장이 우리(북한) 노동자 300명을 월 230불 상당의 쌀을 주는 조건으로 내가 제공의사를 밝혔다고 보도했는데 나도 모르는 얘기가 남한 신문에 나면 내가 어떻게 되겠소. 또 황장엽 비서 동지는 얼마나 난처해지는지나 아오? 우리들(황장엽, 김덕홍)을 도와주고 보호해 주는데 노력해야 하지 않겠소?”

이: (김덕홍 총사장이 헤어질 때까지 중앙일보 보도내용에 대하여 본인(이연길)이 말했다고 단정하고 매우 흥분하고 있었으므로 본인도 놀랐다고 수차 설득.

(1996. 3. 13. 수. 20:00-22:00)
이: “김용순인가 누군가가 우리(남한)가 보내는 쌀을 안받겠다고 말했다던데 정말 그런 정책 결정을 했습니까? 북한의 자존심 알아줘야겠군요.”

김: “배가 고픈데 무슨 자존심인가요. 쌀이 없어서 걱정이지.”

이: “이산가족 문제를 풀어 나가면 얼마나 좋겠소. 한국에 있는 이산가족들은 나부터 이제 나이 70 고개 넘어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산가족들을 생전에 가족상봉, 서신교류를 시키면 어떻겠소?”

김: “그 문제는 우리 사정을 모르는 말이오. 남한 이산가족들이 남한 물품을 가지고 들어와 선물로 주고 갔을 때 일어나는 부작용을 생각해 보시오. 절대 안됩니다. 이회장이 중국에 데리고 오면 나도 중국에 데리고 올 수 있습니다. 이회장이 직접 하신다면 얼마든지 만나게 해 드리지요. 단 중국에서.”

이: “성혜림이 행방불명되고, 잠비아 외교관 부부와 특수공작원의 한국귀순에 대해 북한에서 알고 있는가?”

김: “이회장. 그렇게도 우리 내부 사정을 모르시오? 나 정도나 알지 완전 보도통제가 되어있는데 어떻게 알겠소. 또 알아도 말했다가는 가족이 몽땅 죽어요.”
김: “금강산 개발 문제는 김일성 수령의 지시로 박경윤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나 지지부진하고 신용이 없어 박을 소외시키고 있었는데 최근 박이 진정서를 당에 제출했으나 각하해 버렸습니다. 나는 남한에서 운영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머지않아 새로운 결정이 날 것입니다.”
김: “남한도 군사력을 상당히 증강해야 합니다.”

이: “무슨 말이오? 남한이나 북한이나 군사력을 줄여 그 비용을 산업발전에 써야 평화적으로 통일이 될 것 아니오.”

김: “그것은 그게 아니고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이고 원칙론입니다. 우리에게는 상상외로 막강한 군사력과 알려지지 않은 신 병기가 많습니다. 여기에 대응하려면 남한도 우선 대폭적으로 군사력을 증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한의 국방력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형편없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조선반도에서 어떤 경우라도 전쟁만은 막아야 합니다.”

(1996. 3. 14. 목. 19:00-22:00)
김: “이번에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고 전쟁이 나면 우리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뒤떨어지는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 그래서 남한도 군사력 증강이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다음 속삭이는 말로)김정일은 상당한 재산이 사유화되어 있고, 사실 우리네는 모든 사람들이 사유화가 금지되어 불가능한데 그 친구 측근들 몇 사람도 사유재산을 가지고 있고, 외국은행에도 상당한 재산이 예치되어 있다고 해요.”
김: “그런데 무당들이 한국에 많습니까?”

이: “무당들이 꽤 많지요. 나도 심여인 얘기를 들었습니다.”

김: “루마니아 차우세스크와 같이 그러한 비참한 말로를 얘기했는데 알고 있습니까?”

이: “그것도 충분히 가상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심여인의 예언은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니오.”

김: “북민협(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의 약칭)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한 마디로 말하면 김부자 세습 정권 타도가 주목적이지요. 우리는 새로운 대체세력이 등장해야 남북대화가 진전된다고 봅니다.”

김: “그러면 이회장께서 다음 만날 때 북민협의 회칙같은거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이: “그러지요.”

김: “이회장님. 우리를 지원해 주시고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김덕홍 총사장이 이연길 회장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봄.) 우리 망명자들을 어떻게 대우해 주고 있습니까?”

이: “망명자는 북한에서의 위치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고 있어 나 보다 더 잘 살고 있지요.”

김: “우리 첩자들이 상당수 남한에 침투해 있습니다. 각계 기관에서 암약하고 있지요. 특히 안기부 내에 있는 사람은 매일 팩스로 연락하고 있습니다.”

이: “그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이름을 대줄 수 있습니까?”
(여기서 김덕홍은 고개를 마구 흔들면서 일어나서 이 달 20일쯤 평양에 갔다가 4월 초순에 올 거라면서 다시 내가 연락 드리겠다 라고 말하고 이연길 회장 숙소를 나갔음.)

(1996. 7. 4. 06:10-06:35)
김: “지난 6월 15일 황장엽 비서동지가 출근길에 평양에 있는 내 사무실에 들러 봉투에 든 서류를 꺼내 보라고 하기에 내가 보니 남한의 청와대에 근무하는 고위층 인사가 제보자(북한측에 알려준 사람)와 나눈 대화록이었습니다. 황장엽 비서는 이 문건은 극비문서로 분류돼 당비서에게만 배포된 서류라고 말했습니다.”
김덕홍 사장은 북한이 원자탄 5개를 가지고 있다는 것. 전방에 배치된 장거리포가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점. 일본이나 미국이 서둘러 북한을 원조해 줘서는 안된다는 점 등을 말한 후 “만약의 경우 북한에서 나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 죽을 결심이니 자살용 극약을 구해 달라. 우리의 이러한 제보는 민족과 조국을 위한 결단이지 간첩행위가 아니다. 북한의 현실은 작년 수해를 빙자한 것일 뿐 10년 전부터 누적된 것이다. 실제로 굶어죽는 사람이 연간 수 천명에 이른다. 굶어서 합병증으로 죽는 것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했다.

(1996. 7. 26. 오후 2시 북경 21세기 호텔 2201호)
김: 김실장 언급 건(김광일 비서실장) 조사가 잘 진행되고 있는가.

이: 진행중이다. 그러나 확실한 근거가 애매하다. 김사장이 보았다는 문건의 카피를 떠다달라. 그래야 진행중인 내사가 잘 풀릴 것이다.

김: 황선생은 고매한 전략가다. 인품이 출중한 분이 카피를 하자고 할는지 모르겠다. 잘 안되면 내가 주의를 기울여서 자세히 보고 와서 얘기하겠다. 이선생 얘기는 충분히 이해하겠다. 황선생은 경륜이 깊고 높은 분이다. 우리는 중국에 근거를 확보하고 활동자금도 확보하고 젊은 계층을 포섭하려 한다.

이: 심양의 호텔은 어떻게 알아보았는가.

김: 한 발 늦었다. 심양의 어느 기업가가 이미 손을 댔다.

이: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김: 다시 알아보고 찾아야겠다. 우리가 사업체에 매달리는 것은 먼저 말한 대로 거점 확보다. 이것이 제대로 되면 황선생은 망명할 것이다. 그리고 망명정부까지 구상하고 있다.

이: 단시일에 그렇게 한다면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김일성에게 협력해서 공화국을 세웠던 구 소련출신들이 김일성에게 축출되어 다시 소련으로 돌아간 인사들 중에 이미 망명정부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김: 그런 분들도 함께 해도 좋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분들이 모이면 힘이 커지지 않겠는가.

이: 당신의 얘기 듣고 고무됐다. 당신들 사회에 그런 생각까지 품고 있는 분들이 있다니 참으로 대견하다. 그러나 황선생은 그 안에서 할 일이 많다고 본다. 너무 서둘러서는 그르치기 쉽다.

김: 그러니까 그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이곳에 거점을 확보하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거점이 단단해지면 마음놓고 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황선생과 나만이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모의하고 있지만 기반이 조성되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모두가 불만이 가득하지만 말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는 형편이다. 황선생의 거취는 거기서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결행할 것이다. 황선생의 아들에 경모가 있다. 이 애는 나를 삼촌이라 부르며 따르고 있다. 경모는 김일성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주체과학원 철학연구반 준박사를 획득했으며, 용모가 수려하고, 태권도 7단에 수영을 잘 하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군부와  호위총국 내에 아는 사람이 많다. 성격이 활발하고, 행동적이다. 현재 군 소속 외화벌이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앞으로 중국으로 나오게 해서 데리고 있을 예정이다. 황경모군은 김정일 정권의 타락상과 공화국의 모순과 장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고위층 자제들과 교우로 외국에 나와본 사람 못지 않게 국내외 사정이 밝다.

이: 우리 언젠가 얘기하던 내부에서 거사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인가.

김: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전에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가능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젊은 층을 포섭해야 한다. 지금의 30대 젊은이들은 우리 때와는 사고가 다르다. 그래서 중국에 나와있는 젊은이들과 많이 접촉하고 있다.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가니까.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의 생활은 엉망이다. 알콜 중독자가 되어 술기운이 떨어지면 계속 술을 마시고 병원에서 링겔 주사를 꼽고 있는 상태에서도 술을 마실 정도의 중(重)중독자이다. 그래서 남편(장성택)하고도 벌써 오래 전부터 별거 중에 있다. 김정일이 타락한 생활을 하니까 그 동생도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이: 황경모 군에 관심있다. 아버지는 학자풍인데 닮았는가.

김: 아주 수려하게 잘생기고 좋은 체격이다. 성격이랑 전연 아버지하고 다르다. 아주 행동적인 청년이다. 또 사교적이고 명랑하다.

1996. 7. 27. 10:30에 북경 모 호텔 커피숍에서 이연길  회장을 만난 김덕홍 사장은 자살용 독약을 빨리 구해달라는 것, 공화국의 자구책은 김정일의 하야나 국외망명이 최선책이라는 점, 만약을 위해 중국 국적을 취득하겠다는 점, 황선생은 결심이 섰다는 점 등에 관해 얘기했고, 1996. 11. 10. 김덕홍 사장은 황장엽 선생의 친필 서신을 이연길 회장에게 전했다.

황장엽 선생의 친필서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황장엽 서신

《원래 주체사상은 김일성 주석의 이름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극복하고 인간의 운명개척의 길을 밝히기 위해 창시된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들의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이 학설은 왜곡되어 독재의 무기로 이용되고, 남(南)의 청년학생들을 기만하는데 이용되었다.

지금 짬짬이 써 놓은 글은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여 생각을 그대로 쓰지 못한 점도 있고 방조자도 없이 짬 시간에 쓰다보니 논리적으로 다듬을 사이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수정 가필했으면 좋겠으나 그럴 조건이 없으므로 독자들이 구체적인 문구나 표현에 구애됨이 없이 대의를 잘 파악해 주기 바란다. 당면하여 이남의 주사파 학생들과 지하조직 일꾼들을 계몽시켜 그들이 북(北)의 가짜 주체사상 선전에서 해방되어 진짜 주체사상을 체득하도록 하는데 참고자료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짜 주체사상에 오염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읽게 하고, 토론한 다음 그 토론을 지도함이 좋을 것 같다.

토론 지도자를 북에서 비교적 준비된 사람을 데려가면 좋을 것이다. 이 사상을 독자적으로 해석할 만한 사람은 북에도 몇 사람 안된다. 그들도 더 전개는 못하는 형편이다. 양성사업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할 수 없다. 공개하지 말고 내부자료로 이용하며, 필자의 이름은 절대로 밝히지 말아 주기 바란다. 비교적 주체사상을 잘 아는 사람이 세 명 있는데 그 중 한 명은 그의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게 데려가면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 본다. 가족들에 대한 박해가 봉건사회 이상으로 무자비하기 때문에 보통 방법으로는 이남으로 갈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다.》

황장엽 선생은 그가 한국에 있는 주사파 등에게 실체를 알리기 위해 사용하라는 글을 수시 이연길 회장에게 보냈다. 이 서신은 그와 관련한 내용이다.

◇ 1996. 11. 10. 황장엽 선생의 친필 서신 내용
《남한에서 정치적으로 나서고 싶지 않다. 만일 정치적 직위를 맡았다면 북에서 아첨하여 더 신임을 얻었을 것이다. 나이도 많고 또 정치적 수완도 보잘 것 없다. 할 수 있다면 이 부분의 고문의 역할이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얼마 남지 않은 여생, 가능하다면 주체사상을 더 알기 쉽게 정리하여 조국인민에게 남기고 싶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참화를 피하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고 싶다. 여기는 가까운 사람이 없다. 겉으로 다 가까운 사람이지만 이 체제의 감시 속에서의 교제이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지면 진리를 지지하여 나설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 부분’이라 함은 사상분야를 말한다.

《거사는 심중히 하기 바란다. 무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왔다는 것, 사람들이 다년간 오염되고 기만당하여 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람들의 머리가 굳어졌다. 경제는 파탄되었으나 아직 민심이 일정한 이념을 가지고 이 통치의 부당성을 비판하여 나설 정도로 성숙되지는 못했다. 내부적으로 전복은 시기 상조라고 본다.》

《잠수함 사건을 계기로 힘을 시위하였고, 미사일 시험을 하려했으나 세계여론이 나빠지자 중지함. 천 백 배로 보복하겠다고 선포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어떻게 체면 유지할 것인가 하여 미국과 담판하려고 함. 미국에 미사일 시험중지와 간첩석방을 조건으로 잠수함 인원들의 시체만이라도 넘겨받으면 보복 않겠다고 떠들어 체면유지나 할 것으로 생각함. 잠수함 사건을 계기로 북의 침략위협을 국민들 속에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주사파의 매국 매족적 오류를 비판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것. 이와 함께 가짜 주체사상, 진짜 사회주의, 허위로 충만된 북의 정치진상 폭로할 것. 잠수함 사건가지고 회담하자는 것, 4자회담 참가 가능성 있다는 것 다 거짓임. 절대 기대걸지 말 것. 회담에 응하지도 말 것. 시간 벌기다. 신축성 의거하여 장기집권에 이용할 것임.》

◇1996. 11. 15. 황장엽 선생의 세 번 째 친필 서신
《전략전술에서 기회를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 이번 출장기회를 잘 이용함이 필요하다고 봄. 현재 형편에서 전쟁 밖에 다른 출로 없다고 생각됨. 이 점을 명심함이 필요함. 비서동지도 이 점에 유의하기 바람.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서두를 필요가 없으며 혼자 희생되어도 후회할 것이 없음.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는 길밖에 출로가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 전쟁을 미리 방지하거나 일어나는 경우 손실을 최대한으로 줄이겠는가. 학생들과 지하조직의 역할을 어떻게 저지시키겠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문제로, 민족의 운명문제로 제기됨. 한편 전쟁준비를 마지막으로 다그치면서 군단장들까지 검토하는 조건에서 우리 지위가 안전하다고 볼 수 없음. 감시집단으로부터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도청과 직접 감시를 1주일만 계속하면 다 들여다 본다함. 당국이 지금 대체로 파악하고 활동정형을 감시하기 위해 손쓰지 않을 수도 있음. 그러므로 명년 2월에 가는 것이 허용되는 경우 그 기회를 이용함이 제일 필요할 것같이 생각됨. 이런 문제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후세의 웃음거리로 됨.》

◇1997. 1. 2. 황장엽 선생의 네 번 째 친필 서신
《남북간의 대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봉건주의 사이의 대립이다. 지금 북은 사회주의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 인민들, 노동자, 농민들, 지식인 등이 굶어죽는 사회가 어떻게 사회주의 사회로 될 수 있겠는가. 소련식 사회주의 하에서 독재가 심했다하지만 오늘 북한에서와 같은 세습적인 독재는 없었다.

후계자는 날 때부터 광명성으로 태어나 자기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기로 하늘이 결정한 것으로 선전하고 있다. 이들 부자들은 신격화하기 위한 형용사가 모자라게 되자 자연현상까지 위대한 장군님과 결부시켜 신비화하고 있다.

위대한 장군님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비오던 날씨도 인차(곧바로) 개이고 장군님을 보호하기 위하여서는 안개가 갠다고 하는 따위의 미신을 로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에서까지 공공연히 선전하고 있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가 비판되고 그 후 다른 사회주의의 나라 등에서도 민주화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나 북은 반대로 개인에 대한 숭배를 절대화하고 이른바 수령에 대한 절대적 숭배를 요구하는 수령관을 당 건설과 모든 당 활동 모든 정책 작성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북에서의 상황은 위대한 수령을 찬양하고 수령에 대한 충성과 효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일상화되어 있다. 참으로 놀라운 지경이며, 위대한 장군님에게도 실증이 나지 않겠는가 의심될 지경이다. 소위 조직생활이 되는 것은 아침부터 수령을 찬양하고 수령께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남의 청년학생들이 북이 사회주의가 아니고 봉건주의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북에 대하여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위대한 장군님이 얼마나 교만하고 안하무인격으로 되었는가 하는 것은 지난해 96년 12월 7일 자기 측근자들에게 담화를 정리하여 당조직들이 내려보낸 문건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지금 인민들이 당 중앙위원회의 지시를 무조건 받아드리는 것은 나의 권위 때문이지 당조직들과 당일꾼들이 일을 잘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의 사업은 똑똑히 도와주는 일꾼이 없습니다. 나는 단신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장군님은 위대하다. 천재다.”하고 자화자찬하다가 이제는 자기가 정말 천재인가 생각하기까지 되었고, 자기만을 절대 숭배하는 것을 강요하고 무조건 복종하도록 독재체제를 세워 놓고는 그 충실한 부하들한테서도 도움을 받는 것이 없이 단신으로 일하고 있다고 뻔뻔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로는 다 자기 개인의 것으로 돌리고 잘못은 다 자기 부하가 저지른 것으로 돌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위대성의 정체이다.
북의 인민들은 지금 최악의 고통을 겪고 있다. 양곡이 약 200만톤이 모자라는데 군량미는 무조건 내야 한다하니 농민들이 자기 식량으로 남겨놓은 몫에서 3개월 분을 떼서 군량미로 바치고 있다. 무단 결석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이럴수록 신문과 방송은 북은 지상낙원이며 온 세계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회주의의 모범인 나라이며 위대한 장군님은 세계혁명의 수령이고 구세주라고 떠들고 있다. 무자비한 탄압과 허위와 기만으로 충만된 암흑의 땅에서 인민들은 전전긍긍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위대한 장군님 만세를 부르고 있다. 봉건사회라도 이 정도 되면 농민폭동이라도 일어날 수 있겠지만 독재체제라 너무나 째이고 탄압이 너무나 무자비하다보니 북의 인민들이 자체의 힘으로 이 도탄 속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안기부와 군대 강화하라.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자면 남북간의 차이를 하늘과 땅 차이로 만들어야 한다. 아마 남이 정치적으로 통일되고 경제적으로 인구 1인당에서 일본을 따라 잡게 되면 평화통일이 실현될 것이다. 남의 경제가 일본을 따라잡자면 정치적으로 안정되어야 했는데 지난 8월에는 대규모 학생소요가 일어났고 이번에는 노조에서 대규모적인 파업을 일으켜 경제발전에 지장을 주고 있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가슴아픈 일인가. 도탄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의 애국주의적 입장에서 이런 현상을 바라보면 미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왜 정치적으로 암둔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가하는 것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북의 마수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하고 청년학생을 비롯한 대중관리, 대중장치를 소홀히 한 남의 정치인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남조선의 정치가가 이렇게 약해 가지고서는 교육과 **을 발전시킨데 기초하여 경제발전 속도를 높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잘못하면 북의 독재자들, 군국주의자들의 침략의 희생물로 될 우려까지 없지 않다.

남의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 하나는 남을 불바다로 만들 기회만 노리고 있으며 남을 내부로부터 와해시켜 보려고 모든 힘을 다하고 있는 북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투쟁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군대를 강화하고 안기부를 강화하라는 것이다.

군대의 사회적 권위를 높여주고 군대를 사상적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안기부를 결정적으로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정권교체에 관계없이 안기부를 군대와 같이 강화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안기부 성원들을 양적으로 늘리는 것보다도 정수분자들로 대열을 꾸리고 사상 리론 수준과 기술 실무수준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안기부 일꾼 양성대학에 수재들을 받아들이고 안기부 일꾼들의 대우를 높이며 그들의 사회적 권위를 높여야 할 것이다. 남의 정치를 바로잡기 위하여서는 강력한 여당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당의 정치수준이 높으면 각계 각층을 통일 단결시킬 수 있고, 학생소요나 노동자들의 파업 같은 것은 얼마든지 정치적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복지사회 건설의 주력군들인 노동자 , 농민, 사무원들 속에 들어가 정치사업을 진행하며 인테리들 속에 들어가 그들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간다면 정치적인 안정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개선하여 국회에서 통과시킨 것은 좋은 일이지만 여당이 각계각층 속에 들어가 정치사업을 대대적으로 벌리는 사업을 선행시켰더라면 이번과 같은 대중적 소요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고 시위를 하여도 여당이 군중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보니 정책을 지지하고 적극적인 시위와 집회를 주동으로 조직하지 못하고 그저 법에 의지하여 경찰에 의지하여 대중운동과 싸우고 피동적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어있다.

당면하여 남조선 정치를 바로잡기 위하여서는 강력한 여당을 건설하고 안기부를 결정적으로 강화하는 두 가지 문제를 기둥으로 틀어쥐고 힘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두 가지 기본 문제를 해결하면서 북에 대하여 올바른 선택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1. 복지사회 건설 구호를 내놓고 남의 각계 각층을 단결시키는 정치에 힘을 집중하는 것이다. 세계화의 구호를 전면에 내걸면 애국주의 사상이 약화될 수도 있고 대국들과의 관계에서 경쟁심을 자극할 수도 있다.
복지사회건설 구호 중 기본 구호를 내놓고 실업을 없애고 인민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사회시책을 실시하는데 큰 힘을 돌린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업에서 손실 보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 여당은 이러한 정책의 정당성을 대중 속에 들어가 널리 선전한다. 대중보도 수단들을 잘 동원하여 군중 쟁취에 힘쓴다.

2. 대북정책, 통일문제를 국가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도록 한다. 북은 남을 공격하는 무력통일을 국가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도록 한다. 북은 남을 공격하는 무력통일을 기본 정책으로 하고 여기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고 있다.

지금 식량난이 너무 심하고 경제가 마비상태에 있기 때문에 당장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겠지만 전쟁준비를 첫 자리에 놓고 모든 일을 꾸미고 있다. 북의 지도자가 자기를 ‘위대한 장군님’으로 내세우고 첫째로도 둘째로도 군대를 강화하는데 힘을 넣고 있는데 대하여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남이 아무리 경제를 발전시켜도 북의 침공을 받게되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된다는 것을 전체 국민이 인식하여야 한다. 북의 침공을 방비하지 않고 경제를 건설하는 것은 사상누각을 건설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이것은 남의 각계 각층을 단결시키는데도 필요하다.

잠수함 사건이 일어나고 북이 보복하겠다고 떠들 때 남의 정치상태가 호전되었었다. 남의 정치인들 뿐 아니라 기업가들, 지식인들, 노동자, 농민들이 북의 침공의 위험성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야수를 앞에 두고 적수공권으로 서로 싸우고 있는 이중적으로 어리석은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남북간의 긴장상태를 은폐하지 말고 대중에게 바로 인식시키며 북이 군국주의를 계속하여 정세를 더욱 약화시키는 한편 북의 인민을 구원하기 위한 운동을 광범위 벌여 남의 인민들이 남북간의 현 실태를 정확히 인식하도록 하게 함이 중요함.

통일원을 강화하여 정권 교체에 관계없이 통일원이 대북전략을 일관하게 실시해 나가도록 함이 필요함. 북의 약점을 정면으로 방지하고 공격할 것이 아니라 더욱 조장시키는 것이 필요. 북의 지도자는 멋없이 허장성세하고 자기를 굉장한 존재로 내세우고 교만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남은 이것을 비방할 것이 아니라 더 조장시키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하여 축전을 통하여 북의 군사력은 막강하다는 것. 위대한 장군님은 백전 백승의 강철의 영장으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들을 객관적으로 소개하면서 동시에 이와 결부시켜 북의 비참한 상태를 선전함이 필요함.

북을 개혁개방으로 끌어 내오려고 정면으로 노력할 것이 아니라 북의 지도자는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자기가 선택한 독창적인 길을 걷고 있다고 평가해 주면서 개혁 개방을 하지 않고 봉건적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인민대중을 기아와 빈궁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소개함이 필요.

남한이 아직도 4자회담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 북은 4자회담을 해도 그것을 남과 미, 남과 중 사이를 이간시키는 마당으로 이용하려고 교활하게 책동할 뿐 절대로 남과 타협하려는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굳게 굳게 명심할 필요 있음. 만일 북이 좀 양보하는 것같이 보이면 그야말로 정반대되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함. 대화는 백해무익함. 그보다 교류를 강조함이 필요.

남의 학생들이 수천명씩 북에 와서 6개월 정도 있으면서 북의 비참한 상태를 보게함이 필요. 임수경과 같은 학생을 1-2명 들여보내면 전력을 다하여 속일 수 있음. 대량적으로 들여보내는 전술을 써야함. 그리고 북에서 중국 동북지방으로 탈출하는 사람이 속출하여 중국에서 애를 먹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서도 남측이 구원대책을 세우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고 봄.

북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북의 비참한 생활 형편, 극악무도한 독재의 후과를 남측이나 미국, 일본이 정확히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북은 미일관계를 생명같이 여기고 있다. 북의 정책은 밖으로부터 자기 내막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안개가 낀 흐린 상태로 만들고 북의 인민들이 외부를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우고 외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북을 최대한 고립시키기 위한 대책 필요함. 남측이 대국들과의 관계에서 더 겸손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좋다고 봄. 남측은 미, 일, 중에 대하여 겸손하게 먼저 찾아가고 초청하여 최대한 정중히 환대하는 것이 중요하며 작은 문제에서는 양보함이 필요. 북의 소위 고자세 외교를 자주 조장시켜 더욱 고립시켜야 함. 남이 대국들과 더욱 적극적으로 친밀히 지냄은 북과 대국들을 이간시키는 방도로도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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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안에 북한 동포를 구출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녔던 황장엽·김덕홍씨는 남북한 당국이 밀착, 김정일이 소생하고, 한국에 온 당신은 ‘찬밥’ 신세가 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북한 동포에게 ‘희망의 등대’이어야 할 대한민국에서는 정체성 불명의 회색 빛 인사들이 수령세력을 배격하는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수구세력’이니 ‘반통일 세력’이니 하면서 ‘조선로동당’의 대남사업을 대행해 주고 있다.
민족정의를 구현함에 있어서 수령절대주의 독재세력을 이해하고 감싸줘야만 수구세력이 아니고 반통일세력이 아니란 말인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싶으며, 무엇을 믿고 그러는가.
미국이 한국을 지켜주기 때문에? 수령을 믿기 때문에? 아니면 수령이 와도 전력을 감안하여 봐줄 것 같아서?
체제와 통치권의 선택을 국민이 하는 것이 민족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