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북한운동연합
 
로날드 레이건과 공산주의의 붕괴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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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3일의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 자세에 큰 변화가 읽히고 있다.

1월2일 TV와 라디오로 중계된 신년 연설은 그 같은 이 대통령의 자세 변화를 웅변해 주었다. 그는 “연평도 도발 이전과 이후가 똑 같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북이 우리의 영토를 한 치도 넘보게 할 수 없다”면서 “앞으로 도발에는 단호하고 강력한 응징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북이 감히 도발을 생각할 수 없도록 확고한 억지력의 확보”를 다짐하면서 “이를 위한 국방개혁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제부터는 튼튼한 안보에 토대를 둔 평화 정책과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다짐하면서 “나아가 북한 동포들을 자유와 번영의 장정에 동참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을 제창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대통령이 지난 11월29일자 담화에서 다짐했던 것처럼 중요한 것은 “말보다는 행동”이고 그러한 뜻에서 그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역사적 교훈이 있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을 이끌었던 미국의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 제40대 대통령이 공산주의에 대하여 전개했던 십자군(十字軍) 전쟁의 성공적 전말(顚末)이다. 다음은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리 에드워즈(Lee Edwards) 박사가 작년 초 부다페스트의 헝가리 과학원에서 행한 “로날드 레이건과 공산주의의 붕괴”라는 제목의 강연 내용이다. 모쪼록 이명박 정부 안의 대북정책 관계자, 그리고 특히 이 대통령의, 일독(一讀)을 권한다.

李東馥 [15대 국회의원/전 남북고위급회담 대표]

 
소련의 붕괴는 로마의 멸망과 같은 역사적 사건

40년간 40개 이상의 국가들을 지배하고 또 20세기 중에 무려 1억명 이상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암흑의 독재국가였던 공산국가 소련이, 단 한 방의 총알도 발사되지 않았는데도, 20년 전 돌연 붕괴되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불과 2년 사이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소련이 해체되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 채 역사의 잿더미 속에 매몰되었다.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아래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었고 문 위에서는 샴페인을 터뜨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바클라브 하벨 전 대통령은 “소련 제국(帝國)의 붕괴는 그것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의 차원에서 볼 때 로마 제국의 붕괴에 비견될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다”라고 갈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공산제국이 붕괴한 원인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견해는 구구했었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은 불가피한 귀결”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소련의 붕괴는 트루만 대통령의 역사적인 대소 봉쇄정책이나 레이건 대통령의 “힘에 의한 평화” 전략과는 무관하게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이들 학자들의 주장 가운데 가장 엉터리 주장은 “소련의 미하일 골바초프 대통령이 냉전시대의 진짜 영웅”이라는 것이었다.

골바초프가 동서 냉전사에서 중요한 해였던 1989년에 “사회주의 국가들을 존속시키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소련은 무력 사용도 불사한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부정함으로써 동부와 중부 유럽의 공산국가 지도자들과 정권들의 토대를 무너뜨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이 실제로 발생한 역사적 사실들이 골바초프로 하여금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우리가 이해해야 할 일이 있다. 선거에 의하지 아니 한 방법으로 자신이 권좌를 차지한 골바초프는 결코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었고 다만 글라스노스트(glasnost•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개혁)를 이용하여 소련이라는 일당독재 국가를 고수하려 했을 뿐이었다. 골바초프가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버리고 그 대신 동부 및 중부 유럽의 위성국가들로 하여금 “각기 자기 방식의 공산주의를 지향”하게 허용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1989년의 소련의 군사력이 1956년 헝가리 의거와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을 때보다 현저하게 약화되어 있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경제적 파탄을 막기 위하여 서방으로부터의 무역과 기술 도입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소련이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고수할 경우에는 서방으로부터의 그 같은 무역과 기술 도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것이었다.

냉전 종식의 최대 공로자는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

당시 서방세계에는 소련으로 하여금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버리고 군비경쟁을 포기하며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전쟁이 아니라 협상을 통하여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 동의하게 만든 유일한 지도자가 있었다. 냉전에서 서방 세계를 승리로 이끈 이 지도자는 미국의 제40대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이다.

대소 봉쇄정책(Containment)이 35년 째 지속되고 있던 1980년의 국제정세는 냉전의 승자로 오히려 소련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폴란드에서의 계엄령 선포,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니카라과에서의 마르크스주의 계열 산디니스타의 집권 및 모잠비크와 앙골라에서의 공산당 정권 장악 등 일련의 상황은 분명히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승전고를 울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서양동맹(Atlantic Alliance)은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마지하고 있었고 논자들 간에는 “대서양동맹은 이미 끝났다”는 논란도 등장하고 있었다. 소련은 핵탄두를 장착하고 유럽의 여러 주요 도시들을 겨냥한 SS-20 유도탄을 실전 배치하고 있었다. 서유럽의 몇몇 나라 정부들은, 심지어는 자국의 영토에서도, 소련에 맞설 용기를 잃고 있었다. 미국과 서방 세계에게는 분명히 새로운 대소 전략이 필요해 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그 새로운 대소 전략은 아이비 리그 명문 대학의 교수들이나, 워싱턴 소재 연구소의 분석가들은 물론 뉴욕타임스의 논설위원들이 아닌 영화배우 출신 전직 주지사의 머리 안에서 태동되고 있었다.

“우리(미국)가 승리하고 그들(소련)이 패배해야 한다”


그가 미국 제4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4년 전인 1977년1월 로날드 레이건은 한 방문객에게 그가 냉전 종식 방안 발굴에 골몰하고 있고 이미 하나의 방안을 개발해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개발한 방안은 “우리(미국)가 승리하고 그들(소련)이 패배하는 것”이었다. 지난 40년간 미국과 서방은 소련에 대해 ‘봉쇄정책’, ‘데탕트’(detente•긴장완화) 및 ’화해(accommodation)‘ 등의 유화정책을 계속 추구해 왔지만 1981년 대통령에 취임한 레이건은 “이제 소련에 대해서는 비기기 작전이 아니라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레이건은 대통령에 취임하기 무섭게 소련에 대해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통령으로 가진 첫 번째 기자회견에서 소련에 대한 포문을 열었다. 그는 소련의 지도부가 “여전히 하나의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 적화 혁명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고 매도했다.

미국의 체제내 인사들은 레이건의 호전적 발언과 자기류의 시국관에 경악했다. 아더 슐레진저 2세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와 같은 하바드 대학 석학들은 “소련은 경제적으로 강력하고 군사적으로도 막강하다”면서 미국이 택해야 할 대소 정책은 “데탕트를 계속 추구함으로써 장차 어느 시점에 가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 수렴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이건의 생각은 달랐다. 레이건 대통령은 그가 입수한 정보자료들과 이에 대한 그 자신의 분석결과를 토대로 “공산주의는 이미 무너지고 있어서 머지않아 붕괴될 것”이라는 확신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는 그가 백악관의 임자가 된 후 첫 한 해 동안에 도합 57회의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하면서 소련과의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략 개발을 직접 주도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우선 ‘철의 장막’ 안에서 40년 가까운 세월을 고난 속에서 보내고 있는 동 유럽 및 중부 유럽 국민들에게 자유세계가 그들을 망각하지 않았으며 머지않아 새로운 자유의 새벽이 그들에게 동틀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노력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1956년 맨손, 빈주먹으로 공산독재에 저항하는 의거를 일으켰던 헝가리 국민들의 용기를 찬양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레이건은 헝가리 의거 제25주년을 맞이한 1981년10월 “헝가리의 자유의 투사들이 전개한 항쟁은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정의를 지켜야 한다는 새로운 사명감을 갖게 했다”고 역설했고 1982년 영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는 “1956년의 헝가리 의거는 절대로 좌절되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다시 고개를 드는 자유와 자결에 대한 인간의 태생적인 욕구를 상징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惡의 帝國의 末路는 역사의 잿더미에 묻히는 것”

레이건의 대소 냉전 전략은 1982년5월 처음으로 시동이 걸렸다. 그는 그의 모교에서의 연설에서 “소련 제국은 경직된 중앙집권 체제가 기술혁신과 능률 및 개인적 성취의 동기를 파괴한 결과로 이제 무너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레이건은 영국 의회에서의 연설에서 “소련은 심각한 혁명적 위기에 봉착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전 세계적인 자유화 투쟁 앞에서 결국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 행진은 과거에 자유를 질식시키고 자결권을 억압했던 모든 다른 독재자들의 말로(末路)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처럼 결국 마르크스-레닌주의도 역사의 잿더미 속에 묻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예언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그의 국가안보 팀에게 소련의 붕괴를 위한 구체적 전략의 수립을 지시했고 그 결과 일련의 '국가안보정책결정지침'(NSDD)이 만들어졌다. NSDD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NSDD-32는 미국이 동부 및 중부 유럽 공산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장악을 ‘무력화’시킬 것을 선언하고 이 지역, 그 가운데서도 특히 폴란드의 반소·반공 세력들을 지원하기 위한 비밀 및 기타 공작 추진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았다.

►NSDD-66은 금융 신용과 고난도 기술 및 자연가스 등 3대 전략 부문을 타격함으로써 소련 경제를 마비시키는 것이 미국의 정책임을 선언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지침은 문자 그대로 “비밀리에 소련에 대해 경제전쟁을 선포”하는 것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NSDD-75는 미국이 “더 이상 소련과의 체제 공존을 포기하고 그 대신 소련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로써 미국은, 기회가 있기만 하면,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을 반격할 것임을 선언했다.

國力 隔差에 걸 맞는 군비증강으로 軍事力 優位 확보

레이건은 미국 군사력의 대대적 증강을 명령했다. 레이건은 미국과 소련 간에는 이미 엄청난 경제력의 격차가 발생했다고 판단하고 이 같은 국력차이에 걸 맞는 군사력의 건설을 통하여 미국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가 확보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레이건은 전임 카터 행정부가 폐기했던 B-1 폭격기 생산 계획을 되살렸고 트라이덴트 미사일 탑재 핵추진 잠수함 건설과 다탄두 장거리 대륙간 탄도탄 피스키퍼 생산을 재개했다. 이른바 ‘3원 핵전력’(Nuclear Triad)의 증강이었다. 소련의 SS-20 배치에 대해서 레이건은 서독에 퍼싱-II 유도탄을 배치하는 것으로 맞섰다. 레이건은 미 해군의 함정 600척 보유 계획도 공표했다. 전임 카터 행정부 마지막 해인 1980년에 1,340억 달러였던 미국 국방비는 레이건 행정부 최종 연도인 1989년에는 2,530억 달러, GNP 대비 7%로 증액되어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이 같은 무한(無限) 군비경쟁에 대해 브레즈네프의 소련도 소련 나름의 군비증강으로 맞서 보려 했다. 소련은 1980년대 초반에는 GNP 대비 국방비 지출을 22%로부터 27%로 끌어 올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역불급(力不及)이었다. 소련은 이 같은 힘겨운 군비증강을 위하여 일반경제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소련은 소비재의 생산을 1980년의 수준으로 동결했고 그 결과 전반적인 경제의 파탄을 감수해야 했다.

레이건 독트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 진 새로운 대소 정책에 의거하여 레이건 행정부는 CIA(중앙정보국)의 특수활동부대들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배치했고 이 부대들은 그곳의 무자헤딘 유격군에게 훈련과 장비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군에 대한 그들의 무장 항전을 지원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결정의 하나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세력에게 스팅거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을 제공한 것이었다. 무자헤딘은 이 미사일로 소련군의 헬리콥터를 공격하여 격추시키기 시작했다.

1983년은 레이건의 냉전전략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 해였다. 이 해 3월, 레이건은 한 기독교 목사들과의 회동 석상에서 소련을 가리켜 “오늘날 세계의 악의 심장”이며 “악의 제국”이라고 단정했다. 같은 달, 레이건은 새롭고 종합적인 ‘대 탄도탄 유도탄 방어망’의 개발 및 배치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 계획이 그의 국방정책에서 최우선 순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레이건이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전략적 방어 구상)라고 명명한 이 계획을 비판적 진보세력들은 “별들의 전쟁”(Star Wars)이라고 폄하했지만 뒷날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유리 안드로포프는 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 SDI는 “공격적 무기체계”로 “미국의 대소 핵공격을 위한 준비”라고 비난했다.

"SDI는 소련의 모든 방공망 체계를 無力化시켰다“

SDI에 대한 소련의 격렬한 반발은 곧 소련의 과학자들이 SDI는 한낱 ‘허풍’이 아니라 그들이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기술적 성취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소련 국방성의 전략분석국장으로 1983년 소련 공산당정치국 회의에서 SDI에 대한 보고를 한 한 소련 장군은 그때 그의 보고 결론은 “우리가 SDI를 격퇴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은 고사하고 SDI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방공망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1983년10월 레이건 대통령은 6개의 카리브 해 연안국 군대와 함께 2천명의 미군을 그레나다에 파견하여 그곳에 수립된 마르크스주의 정권을 힘으로 전복시켰다. 이 사건은 40여년 계속된 냉전 기간 중 미국이 군사력으로 공산국가의 정부를 전복시키고 힘으로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이로써 미국은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소련의 브리즈네프 독트린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그로부터 6년 뒤 소련의 골바초프 정권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골바초프는 1985년3월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에 취임함으로써 소련 제국의 해체 과정을 주재하게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악화일로의 소련 내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힘의 입장’에서 실현시킨 골바초프와의 네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골바초프로 하여금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포기하고 평화공존을 수용하게 만드는 외교적 노력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골바초프 씨 이 障壁을 허무시오!”

골바초프와의 정상외교 외로도 레이건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를 장식한 두 개의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 사건은, 1987년6월2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레이건이 행한 유명한 연설이다. 이날 레이건은 소련공산당 서기장 골바초프를 거명하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골바초프 서기장, 만약 귀하가 평화를 추구한다면, 만약 귀하가 소련과 동부 유럽의 번영을 추구한다면, 만약 귀하가 자유화를 추구한다면, 귀하가 이 문으로 올 것을 요구합니다. 골바초프 씨, 이 문을 여시오! 골바초프 씨, 이 장벽을 허무시오!” 그때까지 서방국가의 어느 지도자도 소련의 최고지도자에게 그 같은 직접적인 요구를 공개적으로 제기한 일이 없었다.

두 번째 사건은 레이건 대통령이 1988년 봄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발생했다. 그는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있는 레닌의 웅장한 흰색 흉상 아래서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 및 자유기업이 누리는 축복에 대하여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소련의 저명한 시인 푸시킨이 쓴 시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이제 그 때가 되었다. 친구들아, 이제 그 때가 되었다!” 레이건은 그가 인용한 푸시킨의 시 구절을 통하여 “이제는 소련이 자유화될 때가 되었다”고 포효한 것이었다.

바로 그 다음 해,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동부와 중부 유럽에서 공산주의 체제는 일제히 산산조각이 났다. 이 ‘기적의 해’의 이변은 1989년9월 헝가리가 13,000여명의 동독 탈주민들을 위하여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냉전 기간 중 절대로 뚤리지 않는 철옹성이었던 베를린 장벽은 이에 이어서 무너져 내렸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 정권의 정통성에 도전하고, 군비경쟁에서 주도권을 탈환하며, 인권을 소련은 물론 미국의 무기고에 있는 어떠한 무기보다도 강력한 무기로 활용함으로써 소련이 추구하던 세계 공산화 목표를 포기시켰다. 레이건은 이로써, 냉전을 포함하여, 모든 전쟁에서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결정적인가를 보여준 하나의 산 사례가 되었다.

바웬사, “폴란드는 레이건의 덕으로 자유를 되찾았다”

1983년 초의 어느 날 소련인 간수들이 그에게 소련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를 읽게 허용해 주었을 때 소련의 대표적 반체제 인사였던 네이탄 샤란스키는 시베리아에 있는 한 정치범수용소의 가로 8피트, 세로 10피트 짜리 독방에 갇혀 있었다. 샤란스키는 그때 그가 본 프라우다의 1면은 레이건이 소련을 가리켜 ‘악의 제국’이라고 호칭한 것을 비난하는 전면기사로 뒤덮여 있었다. 샤란스키는 수용소 감방의 벽을 숟가락으로 두드리는 암호 통신이나 화장실에서의 귓속말로 다른 수용소 재소자들에게 레이건의 ‘도발적 언행’을 전파시켰다고 회상했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매도한 레이건의 말은 순식간에 요원의 불처럼 수용소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뒷날, 샤란스키는 이때 레이건이 자유세계의 지도자로써 “우리들 모두의 가슴 속에 불을 점화시킨 진실을 말해 주었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

폴란드에서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고 그 밖의 동부 및 중부 유럽에서 공산주의 체제들을 종식시키는 길을 터놓은 솔리다리티 운동의 창시자인 레흐 바웬사는 “폴란드 국민들은 레이건 대통령의 덕분으로 자유를 되찾았다”는 간단한 말로 레이건 대통령에 대한 그의 감상을 표현했다. 이 같은 감상은 바웬사만의 것은 아니다. 이 같은 감상은 철의 장막 저편에 살면서,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분규의 제물이 되었다가 해방되어 자유를 되찾은 수천만 사람들이 냉전의 종식을 가져온 로날드 레이건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에 대해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