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북한운동연합
 
18대 총선이 가진 정치적-역사적 의미?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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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9일 오전 나는 서울 서대문구의 한 투표소에 가서 국민의 권리를 행사했다. 대학교 안에 설치된 투표장에 보이는 이들은 전부가 50대 이상 유권자들이었다. 투표장으로 가는데 표를 찍고 내려오는 우직하게 생긴 건장한 60대 남자 분이 휴대전화로 딱 두 마디만 했다.  "일어나! 2번 찍어!"

  아마도 늦잠 자는 아들을 깨우는 것 같았다. 한 표는 후보, 다른 한 표는 정당에 찍은 뒤 두 투표함에 나누어 넣고 나오는데 선관위 직원이 표를 하나 주었다. '제8대 국회의원선거 투표확인증'이었다. 박물관, 미술관, 市道 지정문화재, 공영 주차장에서 2000원 할인을 받을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표정은 묵묵하게, 지팡이를 짚거나 불편한 몸을 부축당하면서 투표장으로 모여드는 기성세대의 얼굴은 한결 같이 진지했다. 전쟁과 배고픔을 겪은 이들이 조용하게 親北좌익들을 바보, 천둥벌거숭이, 철부지, 인간말종들로 만들면서 대한민국의 進路를 바로잡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4.9 총선 투표율은 46%. 투표율이 낮을수록 50세 이상 老壯層의 영향력은 커진다. 친북좌파 세력을 국회에서 소멸단계로 몰아버린 18대 선거에서 50세 이상은 지난 12.19 大選에 이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보수화와 고령화의 겹침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50세 이상 老壯層은 전체 유권자의 약34%였으나 투표율이 높아 투표자 중 50세 이상은 약41%였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50세 이상 인구가 약1550만 명으로서 전체 유권자 약3800만 명의 약41%를 차지한다. 이들이 지난 大選과 같은 투표율을 보인다면 투표자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에 육박한다. 2017년 선거에선 투표자중에서 50세 이상 유권자들의 비중이 60%를 육박할 것이다.

  지난 大選과 總選에서 50세 이상이 판세를 좌우한 것은 이들이 좌우로 표를 비슷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보수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었기 때문이다. 많은 머리수, 높은 투표율, 보수몰표성향이 겹쳐서 50세 이상 유권자들은 한국의 선거판을 앞으로 좌지우지할 것이다. 인구의 고령화 추세와 한국 사회의 보수화 경향이 겹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한국의 정치성향뿐 아니라 對北(통일)정책, 경제복지 정책을 보수화시킬 것이다.

  1950~53년의 6.25 전쟁은 공산주의 정체를 드러냈다. 한국인들은 ‘빨갱이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先覺했던 李承晩 대통령은 일찍부터 “공산주의는 호열자와 같다. 인간은 호열자와 같이 살 수 없다”고 말하곤 했는데 동족상잔의 이념전쟁을 통하여 보통 한국인들도 李 대통령 수준의 이념무장을 하게 되었다. 한국인은 反共자유민주 체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 결단을 바탕으로 하여 좌익이 정치적으로 일소된 1953년 체제가 출범했다.
 
이 체제 아래서 대한민국은 산업화, 민주화를 성공시켰다. 시간이 흐르자 공산주의의 악마성에 대한 實感이 없고, 6.25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자라났다. 6.25의 藥效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좌파세상 10년은 제2의 6.25
 
  이 젊은 세대를 겨냥한 김정일 정권과 친북좌익들의 이념공세가 성공했다. 친북좌익들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사회는 좌경화되기 시작했다. 일부 보수세력도 좌익 편으로 넘어갔다. 이런 배경하에서 지난 10년간 2代의 좌파정권이 등장했다. 이 정권의 비호하에서 친북좌익들의 발호가 일어났다. 이들은 숨겨놓았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경악한 자유민주 세력(보수층)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총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말로 하는 이념전쟁이 汎사회적으로 再演되었다.

  이 이념전쟁에서 보수층이 승리했다. 국민들의 마음을 잡는 전쟁에서 보수층이 좌파를 누른 것이다. 그 결과로서 작년 대통령 선거와 지난 4.9 총선에서 좌파들이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지난 10년의 좌파세상은 제2의 6.25였다. 6.25가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노출시켜 국민들을 각성시켰듯이 좌파세상 10년은 좌익들의 오만, 무능, 위선, 독선, 반역성을 폭로하여 국민들을 정신차리게 했다. 이 藥效가 앞으로 수십년 간 지속된다면 좌파의 재집권 찬스는 영구히 사라진다. 1953년 체제가 10년간 단절되었다가 다시 2008년 체제로 이어진 셈이다.

  50세 이상 老壯層이 주도한 4.9 總選의 가장 큰 역사적 의미는 6.15 반역선언으로 상징되는 햇볕정책 신봉자들에 대한 심판일 것이다. 노무현 정권하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자유민주 세력(보수층)을 공격하고, 김정일 정권에 굴종하고, 대한민국 헌법정신을 짓밟는 데 앞장 섰던 후보들이 대거 낙선했다.

  정동영, 한명숙, 김근태, 최재천, 김희선, 임종석, 이인영, 임종인, 김원웅 의원 등등. 이는 좌파적 후보들을 집중적으로 공천한 박재승 씨 등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들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다. 좌파정당인 민중당 출신 한나라당 후보들도 7명중 네 명이 낙선했다(아래 별첨 기사 참조).
 
  밀실공천에 대한 응징
 
  老壯層 투표자들이 주력인 보수층은 국회의원 定數인 299석의 거의 3분의 2를 당선시켰다. 비례대표 정당 투표에선 투표자의 약60%가 우파 진영을 지지했다. 보수진영으로 분류할 수 있는 한나라당(153석), 자유선진당(18석), 親朴연대(14석), 그리고 보수적 무소속 후보(15석)를 합치면 200석이다. 통합민주당도 극렬 좌파성향 후보들이 대거 낙선함으로써 중도화될 것이다. 결국 從北세력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세력은 민노당 5석 정도이다. 두 차례 선거를 통하여 한국의 老壯層은 좌익세력을 주먹 한 번 쓰지 않고 조용히 거꾸러뜨리고 1953년 체제를 회복했다.

  많은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은 170석 가량을 얻어 大勝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보수층은 절묘한 선택을 했다. 親朴성향이 강한 老壯層은 한나라당의 공천파동을 부른 책임자들을 낙선시키려고 親朴 무소속 후보와 야당 후보를 밀었다. 大選 때와 공천 때 역할이 컸던 李明博 대통령 측근 4인방 李在五, 이방호, 정종복과 박형준 의원이 낙선했다. 한나라당의 자동판매기라는 말까지 들었던 경상도 유권자들이 擧手機 역할을 거부하고 反민주적인 密室공천에 반기를 든 것이다. 주요 선거 때마다 돌풍을 일으켜온 부산에선 무소속 후보가 여섯, 민주당 후보가 한 명 당선되었다(한나라당은 11명 당선).

  한나라당에서 공천탈락한 뒤 무소속 또는 親朴연대로 출마한 후보들이 많이 당선되었다. 최구식, 김무성, 홍사덕, 김일윤 후보 같은 이들이다. 지역 연고가 없는데도 한나라당으로부터 낙하산식 공천을 받고 경상도로 내려 온 이들은 많이 낙선되었다.

  공직선거법은 국회의원 후보를 지역구에서 競選방식으로 뽑을 경우엔 경선에 참여했던 인물이 탈당하여 출마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번 與野 공천은 경선으로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선거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정당 민주화에 역행한 密室 공천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판은 준엄했다. 親盧인사인 박재승 전 대한변호사 협회 회장이 공천을 주도한 통합민주당은 보수적 인사들을 배제하고 친북적인 인사들을 많이 공천했다가 유권자들의 응징을 당한 셈이다.

  密室공천은 국회의원들을 정당의 실력자들 앞에 줄을 세운다. 이들은 당선된 뒤 국회에 들어와서도 공천권을 쥔 실력자를 위해 충성하지 국가를 위하지 않는다. 헌법은 국회의원에게 ‘국익과 양심에 따라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명령했으나 前근대적 밀실공천은 국회의원을 당파적 이해관계의 인질로 만들어버린다.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그런 방식의 공천에 대해서 경고를 보낸 것이다. 한국의 정치부 기자들이나 논설위원들은 與野 공천의 비민주성을 지적하지 않았으나 유권자들이(특히 보수층이) 본능적으로 그 부당함을 알고 보복을 가한 것이다. 이런 밀실 공천을 방치한 李明博 대통령과 姜在涉 대표도 큰 정치적 상처를 입었다.
 
  大勝한 것은 이명박이 아니라 보수층
 
  李明博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작년 12.19 선거를 잘못 해석하고 오만에 빠졌던 것 같다. 12.19 선거에서 李 후보가 530만 표차로 壓勝한 것은 사실이지만 大勝은 아니었다. 그가 받은 49%의 지지율과 표수는 2002년에 盧武鉉 후보가 받은 것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보수층의 입장에선 大勝이고 壓勝이었다. 보수층은 李明博 후보에 49%, 李會昌 후보에게 15%를 나눠주었다. 李會昌 후보 지지표 속엔 親朴槿惠 표가 많았다. 보수층은 이런 표 가름을 통하여 우파경쟁에 의한 우파확대를 결정한 셈이다.

  우파세력이 한나라당으로 단일화되는 것보다는 복수 우파 정당으로 나눠져 서로 경쟁하는 것이 우파 시장을 넓히고 좌파를 위축시키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셈이다. 李會昌 후보는 탈당 출마로 욕도 많이 먹었으나 충청권 표가 호남편으로 넘어가는 것을 차단했다.

  한나라당의 공천파동으로 인하여 이번 총선도 우파경쟁 체제속에서 치러졌다. 그 결과는 우파의 압도적 당선과 좌파의 위축으로 나타났다. 우파는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親朴연대, 무소속으로 4분 되었다. 한국의 보수화가 엄청난 속도와 규모로 진행되어 우파 정치시장이 충분히 확대되었으므로 통합민주당은 우파 분열의 반사이익을 별로 보지도 못했다. 충남-대전이 자유선진당의 독무대가 됨으로써 통합민주당의 무대는 더욱 좁아졌다.

  親朴槿惠 성향의 보수층은 막판에 가서 親朴성향의 무소속 및 親朴연대 후보 지지로 돌면서 한나라당으로부터 20석 가량을 빼앗아갔다. 辛勝할 것으로 예견되었던 李方鎬 의원은 민노당과 親朴세력의 협공으로 무너졌다. 樂勝할 것으로 보였던 전여옥 의원도 親朴세력이 빠져나가면서 苦戰했다. 한국의 보수진영은 李明博, 朴槿惠, 李會昌에 의하여 3분 된 셈이다.

  국회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한 우파세력이 안보, 對北정책, 법질서 회복, 韓美동맹 부문에서 협조한다면 李明博 정부는 國政 운영을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정권과는 틈이 생겨버린 朴槿惠 세력이 한나라당의 안팎에서 서로 연계하고 통합민주당과 손을 잡게 되면 일대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우파세력이 大乘的으로 단합하려면 국가이념을 공유해야 한다. 李明博 대통령은 ‘이념 없는 실용’을 강조하고 있어 이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선거에 강한 박근혜씨는 이번에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호소를 통하여 한나라당 안팎에 50석이 넘는 親朴 당선자들을 확보했다. 李明博 대통령은 1960년 新舊派式의 政局파탄을 각오하지 않고선 박근혜 세력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대통령 중심제는 대통령에 의한 권력독점 체제가 아니다. 李 대통령이 정권의 상당 부분을 박근혜 세력과 나눠 갖는 것은 권력 배분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발전이다.
 
朴槿惠 의원이 실세 총리나 당 대표가 되는 것이 왜 李明博 대통령이나 나라를 위해서 손해가 될까? 더구나 李 대통령은 朴 의원의 大權 경쟁자도 아니다. 李 대통령은 朴 의원의 저력이 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非運에 간 朴正熙-陸英修에게 품고 있는 50세 이상 老壯層의 향수는 친북좌익 세력을 끝장낸 원동력이었다는 사실도.
 
  3權 쥔 한나라당의 위기
 
  여당이 총선에서 院內과반수를 확보한 것은 1985년 2.12 총선 이후 이번이 2004년 열린당에 이어 두 번째이다. 이로써 한나라당은 대통령, 국회, 지방자치단체 등 3權을 쥐게 되었다. 이는 한나라당의 기회이자 危機이다. 역사적 교훈이 있다.

  1960년 4·19 학생의거로 물러난 李承晩 대통령을 이어받은 許政 과도내각 시절 兩院 내각제로 개헌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5대 총선이 1960년 7월29일에 있었다. 투표율은 84.3%, 야당이던 민주당이 민의원의 233석 중 175석을 차지했다. 참의원 선거에선 민주당이 전체 58석 중 31석이었다.

  압도적 다수당이 된 민주당은 新派, 舊派로 분열했다. 신파가 미는 張勉씨가 민의원에서 국무총리로 뽑혔고, 구파가 미는 尹潽善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신파는 결국 집단탈당, 신민당을 차려 야당이 되었다. 張勉과 尹潽善씨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5·16 군사 쿠데타가 났다는 보고를 받은 尹潽善 대통령은 유명한 말을 했다.  "올 것이 왔구나." 그는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 대장이 쿠데타군 진압을 위해 국군에 출동 명령을 내려줄 것을 건의해도 단호히 거부하여 쿠데타의 성공을 도왔다.

  5·16 군사혁명은 민주당의 분열이 불렀다. 신구파로 분열하여 정권이 약체화되니 사회 질서가 무너졌다. 친북좌익세력이 횃불시위를 벌이고 지하의 좌익들이 여러 단체를 만들어 공개적 활동에 나섰다. 대학생들은 환상적 통일론에 현혹되었다. 국민학생도 데모에 나서고, 주부도 시위를 하고, 나중에는 데모 그만하자는 데모도 했다.

  이런 혼란이 국민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국군을 화나게 했다. 民心과 軍心이 돌아서는 가운데서 朴正熙-金鍾泌의 쿠데타 모의는 거의 공공연히 이뤄졌다. 군 정보기관에서도 뻔히 알고 있었고 육군참모총장 張都暎 장군도 알고 있었지만 나름대로의 得失 계산을 하면서 묵인했다.
 
  分黨사태 올지도
 
  한나라당이 反민주적 밀실 공천과 朴槿惠 세력의 이반에도 불구하고 과반수 의석을 얻은 것은 자신의 실력 덕분이 아니라 國政 파탄의 책임자들인 좌파(親盧)세력을 우선적으로 심판하겠다는 보수층의 현실적 선택 덕분이었다.

  한국 정치의 생리로 미루어 이 승리는 한나라당의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한나라당은 국민들에게 미안해 하는 마음을 잊어먹고 오만해져 곧 自家분열에 휩싸일 것이다. 이념 없는 정당이므로 그 분열은 자리다툼이란 저차원에 머물 것이고 黨權싸움에서 패배한 세력은 分黨도 불사할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제 야당이 발목을 잡아 國政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다는 변명을 할 수도 없다. 국민들도 거대 여당의 변명, 어리광, 집안싸움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자주국방 의지가 약하고 사대주의적인 한국의 정치인들은 태평성대가 와서 여유가 생기면, 무사안일에 빠져 반드시 타락한다. 이것은 고려-조선조의 文民정치를 이어받은 한국 민주정치의 변태적 生理이다. 한나라당이 反共자유민주주의 이념도 포기하고 自淨노력도 포기한다면 남는 것은 경제인데, 여기서도 성과가 없으면 야당과 좌파의 반격이 시작될 것이고 민심의 이반이 가속화될 것이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좌파는 국회에서 다수당이 되고 대통령직도 움켜쥔 상태에서 기고만장했다. 30년 집권계획 운운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탄핵재판에서 파면을 면한 盧武鉉씨는 대통령으로 복직하고 나서 대학생들 앞에서 한다는 말이, "보수는 변하지 못하는 별놈"이라는 험담이었다. 이때가 친북좌파의 쇠망이 시작된 전환점이었다. 오만한 좌파는 자충수로 망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기회주의, 웰빙체질, 여기에 沒이념까지 겹쳐서 친북좌파가 4년 전에 갔던 길을 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문제는 보수층이다. 절대로 이런 한나라당과 공동운명체가 되면 안 된다. 썩은 새끼줄을 붙잡고 인수봉을 올라선 안 된다. 몇 개의 보조 자일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한나라당이 잘못할 때는, 특히 안보, 對北, 외교, 법치 부문에서 희미한 태도를 보일 때는 야당이나 좌파보다 더 강력하게 정권을 비판해야 한다. 잘할 때는 여당보다 더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 是是非非만이 한나라당의 무사안일과 부패를 막고 보수층이 주인 역할을 하게 만들 것이다. 다행히 유권자들은 이번 총선을 통하여 親朴연대, 자유선진당, 보수적 무소속이란 몇 개의 보조자일을 만들었다.
 
 
 全大協 등 親北단체 출신들 沒落 - 全大協 출신들 15명 중 13명 낙선
 
 金成昱(조갑제닷컴 기자)
 
  全大協(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등 親北단체 출신 정치인들이 4·9총선에서 사실상 몰락했다. 全大協은 1987년 설립 이래 국가보안법철폐-주한미군철수-평화협정체결-고려연방제 등 북한의 對南적화노선을 추종했던 대학생조직이다. 12명에 달했던 全大協 출신 국회의원들은 17대 국회에서 국보법철폐 운동 등 대한민국 좌경화(左傾化)를 주도했었다.

  통합민주당은 4·9총선에서 全大協 출신을 15명이나 공천했지만, 이 중 최재성(崔宰誠. 남양주甲)·백원우(白元宇. 시흥甲) 당선자를 제외한 13명이 낙선했다. 낙선된 全大協 출신은 전대협 1기, 2기, 3기 의장인 이인영(구로甲), 오영식(강북甲), 임종석(성동乙) 후보를 비롯해 기타 정청래(마포乙)·우상호(서대문甲)·김태년(성남수정)·이기우(수원권선)·김성환(노원丙)·오중기(포항北)·정진우(부산北강서乙)·박형룡(대구中南)·김만수(부천소사)·박완주(천안乙) 후보 등이다.

  崔宰誠, 白元宇 당선자는 각각 2004년 12월23일 「국보법 年內폐지를 위한 시민사회단체대표·국회의원 공동기자회견」과 2004년 12월17일「국보법 등 개혁·민생입법 年內처리촉구 결의문」에 참가하는 등 17대 국회에서 국보법폐지 선봉에 서 왔던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2004년 9월2일 美의회의 북한인권법 통과에 반발해 주한 美대사관에 항의 서한을 전달했고, 2007년 5월31일 「6·15선언 기념일 지정촉구결의案」에 서명했다.

  崔宰誠 당선자는 1987년 11월13일 국보법 위반 혐의로 징역1년6개월·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었고, 白元宇 당선자 역시 1990년 8월30일 국보법 위반 혐의로 징역1년, 자격정지1년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다.
 
  연방제 주장 全國聯合 출신들도 참패
 
  全大協 이외에도 유사한 노선을 걸으며 올 초까지 왕성히 활동해 온 親北단체 全國聯合(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출신들도 참패했다. 全國聯合은 91년 설립 이래 국가보안법철폐-주한미군철수-연방제통일을 주장해 오다 2008년 2월 「한국진보연대」라는 左派연합체로 발전적 해소(解消)됐다. 全國聯合은 해마다 수백 回의 집회·시위(2006년 한 해 약 800 차례) 등 행사를 치렀으며, 사회적 이슈가 생길 때마다 소위 「OOO범(汎)대위」를 조직해 親北反美운동을 벌여왔다.

  4·9총선에 출마한 全國聯合 출신 10명 중 당선자는 호남지역에 출마한 통합민주당 유선호(柳宣浩, 장흥·강진·영암. 1992~1993년 全國聯合 인권위원)·최규성(崔圭成, 전북 김제·완주. 1992년 全國聯合 통일위원장) 당선자와 민주노동당 강기갑(姜基甲, 경남 사천) 등 3명이다.
  낙선된 全國聯合 출신은 全大協 출신이기도 한 통합민주당 이인영·우상호·이기우·박형룡 후보 外 김희선(동대문甲)·전해철(안산 상록甲) 후보와 무소속 임종인(안산 상록乙) 씨 등이다.
  柳宣浩·崔圭成 당선자는 2004년 12월23일 「국보법 年內폐지를 위한 시민사회단체대표·국회의원 공동기자회견」에 참여하는 등 국보법 폐지 등 4대입법 강행에 앞장서왔다. 姜基甲 당선자 역시 2004년 11월24일 「국보법 개폐관련 법률안 국회심의 촉구 기자회견」에 참여하는 한편, 2007년 10월13일 광화문「간첩·빨치산 추모제 추모위원」으로도 참여하는 등 左派노선을 걸어왔다.
 
  民衆黨 출신들도 상당수 국회진출 失敗
 
  한나라당에서 출마한 민중당(民衆黨) 출신들도 상당수가 국회진출에 실패했다. 民衆黨은 1990년 11월10일 공식출범 이래 『독재(獨裁)권력·독점(獨占)재벌·외세(外勢)지배 청산』 및 『기간산업 및 일정규모 이상의 토지국유화(國有化)』와 『국가보안법 철폐 및 연방제(聯邦制) 통일』을 주장했던 정당이다.

  民衆黨 출신 중 당선자는 한나라당 김성식(金成植, 관악甲)·차명진(車明進, 부천·소사)·임해규(林亥圭, 부천 원미甲) 후보이며, 같은 당 이재오(은평乙)·박형준(부산·수영)·정태윤(부산·남구乙)·허숭(안산·단원甲) 후보 및 통합신당 최윤(춘천) 후보는 모두 낙선했다.
 
  민노당 10석에서 5석으로 위축
 
  이밖에도 국보법철폐·미군철수·연방제통일 등 북한의 對南노선을 주장해 온 민노당이 17대 국회 당시 10석에서 5석으로 위축됐으며, 민노당에서 분리돼 나온 진보신당은 의석확보에 실패했다. 17대 국회에서 對北굴종적 스탠스를 취해 온 통합민주당 김근태, 손학규, 정동영, 김원웅, 장영달, 최재천, 한명숙, 우원식, 정봉주, 유기홍 후보 등 左派성향 의원들도 대거 낙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