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북한운동연합
 
건국대통령 이승만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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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통령 이승만/전 경기도 김문수지사

이승만은 개화운동, 독립운동 및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중심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하고 초대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이끈 것은 역사적 필연이었고, 우리나라를 위하여 행운이었다.

그가 초대대통령이 되어서 10여년간 나라를 이끄는 사이에, 우리나라는 오늘날과 같은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우리 대한민국의 초석이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체제를 말한다.

만약 이승만의 이런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건국의 정당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정체성을 상실하고 혼란에 빠져들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적 혼란은 상당부분 여기에 뿌리박고 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했다가 고종폐위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1899년 1월 9일부터 1904년 8월 9일에 이르기까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의 사형수로 복역했다.

그는 개화운동의 청년기수(旗手)로 인생을 출발했다.
그는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이후 옥중에서도 꾸준히 서양문물을 흡수하여 1904년에 『독립정신』을 저술할 무렵에는 이미 유교적 지식인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자로 변신해있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 1904년 11월 4일에 대한제국의 독립보전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하여 고종의 특사자격으로 도미했다.

당시의 국내외 정세 때문에 미국의 원조를 이끌어내지 못했으나, 1905년 2월부터 1910년 7월에 이르기까지 조지워싱턴대학 학사, 하버드대학 석사 및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적 사상기반을 공고히 했다.

그의 박사학위논문 ‘미국영향하의 영세중립국’은 프린스턴대학의 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1910년 10월에 귀국하여 1912년 3월 26일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서울YMCA와 청년학교에서 교육활동에 종사했다.

미국에 망명해서는 1913년 2월부터 하와이에 활동 근거를 두고 한국인의 교육활동과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참가·활동하는 단체에서 항상 지도자로 추앙되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했기 때문에 3·1운동이후 여러 곳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국무령(國務領)이나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1919년 3월 21일 노령(露領)임시정부의 국무령, 1919년 4월 23일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 및 1919년 9월 6일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의 임시대통령으로 각각 추대되었다.

이승만은 1948년 7월 20일 제헌의회의 대통령선거에서, 자기가 이끄는 정당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적의원 186명중 180명의 압도적 지지로 초대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지도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아마 시국에 대한 탁월한 식견이 아니었던가 추측된다.

우선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식견이다. 당시 독립운동 노선으로서는 일본통치하의 자치론, 실력양성론, 외교론, 무장투쟁론 및 민중혁명론 등 다양하였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방면의 노력이 필요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중요한 분야는 결과적으로 보면 외교분야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한국의 독립은 일본과의 타협이나, 한국민의 실력양성이나, 항일무장투쟁이나, 민중혁명에 의하여 달성된 것이 아니다.

물론 다방면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할 수 있었지만, 한국에 직접적으로 독립의 기회가 주어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이며, 대한민국이 건국될 수 있었던 계기는 UN의 결의에 의하여 주어졌다. 만약 한국의 독립과 건국이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외교가 가지는 중요성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좀더 눈을 크게 뜨고 넓은 시야에서 보면, 저개발국의 독립과 발전에는 국제협력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한 식견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승만이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함으로써 분단의 원흉인 것처럼 비난 받고 있기도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이 건국되지 않았더라면 당시의 세계사적 동향으로 보아 한반도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소련의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 북한에 북한단독정부의 건설을 지령하였는데, 김일성은 이에 호응하여 1946년 2월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정부를 수립하고 곧이어 3월에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국가체제를 공산주의체제로 바꾸고 있었다.

그리고 한! 반도의 단일정부수립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던 미소공동위원회도 한반도에 수립될 정부의 성격에 대하여 미소가 이견(異見)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회의에서 결렬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한반도에서 단독정부가 건설될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이승만의 주도로 한국문제를 UN으로 가져가게 한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었다.

UN이 주도한 한국정부의 수립조차 결과적으로는 남한만의 분단국가에 불과하였다. 미소가 분할·점령한 다른 지역에서도 공통적으로 친미·친소의 두 국가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은 불가피 했다.

이승만의 주도하에 제정된 제헌헌법에서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체제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확정한 것은 혁명적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장래에 건설할 독립국가의 정치경제체제를 선진국으로부터 본받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하려는 건국강령의 초안들이 더러 있기는 하였지만, 막상 국민국가를 건설함에 있어서 정치경제체제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확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한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이 거의 갖추어지지 않았고, 또 저개발국가의 초기 국민국가의 건설은 교도(敎導)민주주의적 체제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제헌헌법에서 정치경제체제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한 역사적 의의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이것은 제헌헌법이 국민들에게 정치경제체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교육시킬 뿐만 아니라, 정부에 대하여 끊임없는 제도개혁을 강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정권에서 단행된 농지개혁, 귀속재산불하 및 국민교육의 보급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실현을 위한 국민적 주체를 창출하는 과정이었다.

한국에서는 근대국민국가가 건설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성공했다기 보다, 근대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선진적 제도를 먼저 도입하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차례로 갖추어가는 과정에서 세계적 모범 국민국가가 건설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승만의 탁월한 식견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1953년 한미방위조약 체결이다.

한미방위조약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국가로 발전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조건이었다.

첫째는 한미방위조약이 없었더라면, 한국이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며 이렇게 오랫동안 평화를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은 공산당일당독재의 전제국가를 건설한 데 비하여, 한국은 자유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함으로써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한미방위조약이 있었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미방위조약을 기초로 미국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를 이끌어냄으로써 60만 대군을 양성할 수 있었다. 국민! 봉 형성은 재정자립과 더불어 근대국가형성의 2대조건 중의 하나이다.

둘째는 한미방위조약은 한미관계의 기초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에서 한미관계가 가지는 중요성은 매우 중요하였다. 한미관계의 중요성은 군사적, 정치적 관계에 한정되지 않았다.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한미관계는 한국의 발전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조건이었다.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저개발국의 독립과 발전에서 선진국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이와 같이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에 큰 공로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승만이 자유주의자와 권위주의자라는 모순된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이승만의 권력욕이라는 그의 인간적 측면에서 비롯된 점도 없지 않았겠지만, 이러한 개인적 측면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체제라는 제도적 형식과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이 결여된 현실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순은 4.19를 계기로 탄생한 순수한 민주주의정권이었던 민주당정권이 1년만에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하게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 보면, 이승만이 권위주의적 권력행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수립하고 지켜낸 공로는 낮게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가 오늘날 번영하는 대한민국의 초석이었기 때문이다.(2014.7.2.)/김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