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북한운동연합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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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 칼럼]
딸을 백 원에 팝니다/그 종이를 목에 건 채/어린 딸 옆에 세운 채/시장에 있던 그 여인은/그는 벙어리였다/팔리는 딸 애와/팔고 있는 모성을 보며/사람들이 던지는 저주에도/땅바닥만 내려보던 그 여인은...그는 어머니였다/딸을 판 백 원으로/밀가루 빵 사 들고 허둥지둥 달려와/이별하는 딸 애의 입술에 넣어주며/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최근 출판된 탈북 시인(詩人) 장진성의 시집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의 한 구절이다. 정호승 시인은 "이것은 시가 아니라 통곡, 분노, 고통, 절망"이라 했다. 이 통곡에 대해 우리 사회의 말쟁이들은 또 뭐라고 할 것인가? "조작이다…" "수구 냉전세력…" "전쟁 하자는 거냐?" "그렇게 떠벌리는 것 자체가 보수 우익…" "중도적으로 바라봐야…" "김정일 자극했다 큰일날라" "북한은 그래도 남한과 다른 자주적, 민족주의적 국가"…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너무나 뻔한 소리다.

그러나 길거리에 나뒹구는 시체를 보며 "누구는 먹지 못해 죽었는지/해골이 보이는 얼굴이고/누구는 얼어서 죽었는지/온 몸이 둥그렇게 굳어지고/누구는 병들어 죽었는지/구더기가 욱실거린다"고 읊는 것이 어떻게 보수 우익만의 '반(反)햇볕' '반(反)진보' '반(反)통일' '반(反)평화' '반(反)중도'의 수구 냉전적 정치 언사(言辭)라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좌파라 할지라도 겨자씨만큼의 양심과 양식만 있다면 도저히 외면하려야 할 수 없는 생생한 실존적 상황 그 자체일 뿐이다.

국가 경영자나 지도급 정치인들로서는 북한을 언급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지식인들 역시 학문하는 사람들로서 '객관적이고 초연한' 자세를 견지해야 할 입장임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그리고 그렇게만 하다 보면 그것은 한낱 몰가치적인 위선과 초현실적인 허구에 빠지기 십상이다.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상황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인지(認知) 행위와 가장 초보적인 감정 이입(移入)조차 하지 않으려는 정책이나 이론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단 한 푼의 값어치라도 있다는 것일까?

장진성 시인은 또 이렇게 통곡한다. "옛날에도/아버지 눈을 위해/쌀 삼백 석에 몸을 던진/인당수가 있었다지만/꺼져가는 목숨 위해/쌀 세 말에 죽고 싶어도/죽고 싶은 인당수가 없어/효도를 못하는 이 나라 딸들에겐…" 바로 칠흑 같은 야밤에 두만강 건너로 몸 팔려 가는 북한 부녀자들의 처참한 현실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 비극적인 인간 상황 앞에서 통일부, 국가인권위원회, 자칭 북한 전문가, 자칭 진취적 지식인들 일부는 과연 두만강에 둥둥 떠다니는 시신들에 대해 '천성산(山) 도롱뇽이 다칠까' 걱정하는 만큼의 애련(愛憐)이라도 가졌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북한 인권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의 한결 같은 고충인즉 바로 젊은 세대의 무관심, 무감동 그리고 전교조식(式) '북한 잘못 알기'라고 했다.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을 통해 육신 없는 영혼으로 죽어가고 있는 사이 우리 젊은이들은 과식(過食)을 통해 영혼 없는 육신으로 죽어가고 있었던 셈이다.

장진성 시인의 통곡은 이어진다. "구제미(救濟米)로 와서는/굶주린 눈앞에서/구걸하는 곁을 지나/선군(先軍)이란 그 곳으로/그 쌀로/열병식 무력시위/먹은 힘 보여주는 선군…독재자의 숨통만 구제하는/인도주의의 배신/적십자의 기만이다." 김대중·노무현식 햇볕은 결국 굶어 죽는 자들을 묵살한 채 굶겨 죽이는 자의 편만 들었다는 이야기다.

이명박 정부가 특별히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정치권과 통일부 '햇볕파(派)'들은 그들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그들의 '남·북' 정치 놀이를 계속 즐기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마지막 정적(靜寂)'임을 선언한 시인은 핏덩이 같은 진실만을 계속 토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