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북한운동연합
 
어느 탈북자의 고향이야기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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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가족의 달이라고 하죠. 어버이날을 맞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보려고 합니다. 제 아버지 이름은 金淳碩입니다. 함경북도 청진시가 고향이고, 23살에 해방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해방 후 북한유일의 문학잡지인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하게 됩니다. 북한 문학사에 ‘해방 후 첫 시인’으로 기록되기도 했죠.

이후 북조선 작가동맹 함경북도 지부장으로 임명되었고 곧 평양으로 소환되어 작가동맹기관지 ‘조선문학’ 편집부장, 평양시 창작실 시분과위원장으로 일하다가 종군기자로 6.25를 치르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창작지도교수로 일하시면서 현재 북한의 대표적 시인들인 차승수, 조빈, 서진명 등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때까지 시인 金淳碩은 북한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향토시인으로 불렸고 북한 작가동맹 대표단의 일원으로 구 쏘련과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쏘련 방문 기념으로 ‘찌플리쓰의 등잔불’이란 시집을 냈고, 종군기자 시절엔 ‘영웅의 땅’,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황금의 땅’과 ‘호수가의 모닥불’이란 시집도 내셨습니다.

탈북 해 한국에 와보니, 북한의 대표적 향토시인이라며 金淳碩의 시를 소개하는 책이 있어 놀란바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金淳碩의 시는 ‘자연주의’와 ‘수정주의’의 된서리를 맞고 사라져버렸습니다. 1961년 8월 북한에선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가 대두하게 되고 김일성의 사상을 추종하지 않던 많은 사람들이 반당, 반혁명분자로 낙인 되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교직원과 학생들 앞에서 ‘자연주의와 수정주의를 가르친 타락한 교원’으로 낙인 되었고 북한작가동맹에서는 金淳碩의 이름과 시집, 창작물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습니다. 믿어지지는 않지만 재가 탈북한 후에도 金淳碩 작사로 만들어진 ‘빨찌산의 노래’나 ‘벼 가을 하려 갈 때’와 같은 노래는 북한방송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무슨 사연이 또 있겠죠.

결국 아버지는 만삭인 제 어머니와 함께 북한의 산간오지인 자강도(평북도) 희천시 공작기계공장으로 추방되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때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강도로 갔고 그곳 자강도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서론이 많이 길었습니다만, 그래서 제 고향은 북한 자강도 희천시 전평구라는 어느 시골마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혁명화라는 이름으로, 또 추방이라는 명목으로 운명이 뒤바뀌고 고향이 뒤바뀐 이들이 어찌 저와 저의 부모님 뿐 이겠습니까. 북녘의 시인들과 예술인들, 그리고 일반 주민들까지 그곳 사람들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이르는 세대교체와 이른바 후계구도 속에서 저의 가족이 겪은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엔, 한번 추방되고 한번 혁명화 대상자가 되면 다시 소생하기가 힘들다는 불문법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반 범죄를 짓고 감옥에 가는 것 보다 정치적 낙오자가 되어 타도대상이 되는 걸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저의 아버지는 가족의 장래를 위해 변신을 꿈꾸게 되죠. 희천공작기계공장이라는 곳에서 2년 동안 노동을 하면서, ‘항상 그이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북한 최초의 노동자 시집을 만들어 출판하게 됩니다. 

북한 최초라는, 또 수령은 항상 노동자들과 함께 계신다는 ‘노동자 시집’은 김일성에게 보고되게 되고 金淳碩을 원상 복귀시키라는 김일성의 ‘감격적인’ 지시가 하달되었다고 합니다. 1963년 3월, 저의 가정은 다시 평양으로 복귀되고, 저도 한 살 때부터 평양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꼭 열일곱살동안 평양에서 살다가 군대에 나갔고, 탈북 전까지 군에 몸담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나 병사의 땀방울이 스며있다고 자부해 왔지만 대한민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전 정말 고향도, 사랑하는 이들도 모두 없는 불행한 인생을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열네 살에 부모님까지 여의다 보니 다름 아닌 내가, 천애고아였더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렇게 고향은 사라지는 것일까요? 그렇게 집없이 살고, 부모없이 살다보면, 고향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일까요? 시인이기를 꿈꾸던 때, 고향을 떠올리면서 썼던 이름 하여 ‘병사의 자서전’입니다.

<산에 살다 고향으로 돌아온 인민군 戰土가 있었습니다. 누구를 찾느냐는 경비실 노인네 앞에서 머뭇거리는 스물일곱 살의 제대군인입니다. 4층7호를 찾아왔는데요. 세대주 이름이… 귀뿌리가 빨개진 전사는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섭니다. 고향집은 그가 바친 석삼년의 군복무 기간에 모래성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돌아가셨고 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고, 스물 세평 작은 집은 얼굴도 모르는 심 아무개의 차지가 되어 버렸나 봅니다. 살아갈 집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파트 골목을 빠져나와 색 바랜 벤치에 앉아 강기슭의 4층집을 멀거니 바라보았습니다. 첫 글을 익히던 조그마한 칠판과 그 곁에 놓여 있던 댑싸리 빗자루, 위험하리만치 가냘픈 어머니의 허리는 그 집 베란다에 늘 걸려 있었습니다. 순이야, 순자야, 얘, 진이야…. 그 어머니 만날 듯싶어 산으로 올랐습니다. 오르고 내리도록 아무도 없는 고향 모란봉 기슭에서 푸드덕, 꿩 한 마리가 날아올랐죠.> (병사의 자서전 전문) 

10년 6개월 동안 사병생활을 마치고 찾아온 고향 집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일체의 개인소유를 허락하지 않는 북한에선 사람이 살다 죽으면 집마저도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어 버린답니다. 그때, 내가 살던 집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계단을 올랐던 심정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후 저는 사병생활 때 군인잡지 등에 열심히 투고했던 시’조각’들의 도움을 받아 평양 김형직사범대학 작가 양성반의 軍위탁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엔 장교로 임관해 어느 시골부대의 예술선전대작가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은 사령관, 정치위원의 보고서를 써주고, 예술단 공연의 코미디 작품을 쓰는 것이었지만, 틈이 나는 대로 시인의 꿈을 키워 나갔었습니다.

당시엔 타부대의 군인들도 제 이름을 부르면 아, 그 사람! 하고 기억해 줄 만큼 여러 편의 시와 수필 등을 잡지에 냈었고, 지금 생각하면 많이 부끄럽지만 군무자축전 때 발표한 작품이 김정일의 칭찬도 받을 만큼 ‘작가’로서의 본분에 충실했었습니다. 그렇게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던 시점에, 덜컥 탈북을 결심해야만 했고 결심한지 3일 만에 북한을 떠났습니다.

이쯤에서 사람들은 왜 탈북했고, 어떤 경로를 통해 한국으로 왔느냐고 끈질기게 묻곤 하죠. 그에 대한 설명을 수백 번 했던 것 같고, 월간지 등에 연재한 바도 있습니다만, 여기선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여타의 탈북자들처럼 북한의 독재체제에 환멸을 느껴야 했던 계기가 있어 대한민국에 왔음을 밝히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북한을 탈출할 때 목숨까지를 걸어야 했던 두만강과 압록강에서의 사투와, 4~5000㎞ 거리를 에돌아야 했던 몽골과 베트남 등의 탈북노정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전 정말 탈북을 결심했을 때, 이제 떠나면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에 진저리를 쳤던 것 같습니다. 외아들인 내가 이 땅을 떠나면 아빠 엄마 산소는 누가 돌보고, 누이들은 또 이 못난 동생을 얼마나 원망할까... 

막상 떠나려고 하니 꼬리를 무는 추억이 나의 발목을 잡았고, 이제 떠나면 죽어서도 고향땅에 묻힐 자격을 잃는 것 같아 온 밤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른 새벽, 잠들어있는 조카애들을 마음에 품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 날, 그 순간을 떠올리며 썼던 시도 아래에 소개하려 합니다.

<떠나던 나를 위해 아무도 울어준 이 없는 곳이 고향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내 나서 첫 걸음 익힌 곳, 못 다한 나의 사랑일지 모릅니다.> 

(시 고백 전문) 

그렇게 사랑했던 모든 것이 추억이 되어버렸습니다. 자라온 환경 때문에, 또 누군가는 자유란 이념 때문에 고향을 떠났다지만, 우리는, 고향을 떠난 그 순간부터 고향사람들이 말하는 ‘배신자’가 되었고, 분단시대의 사생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다 자란 어른이 되어서도 탈북자들은, 고향이야기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해 추석 때, 통일전망대를 찾았던 한 친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꺼이꺼이 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땅에서 아들과 딸과 아내가 굶어 죽었는데 나만 살자고 대한민국에 왔고, 이렇게 살아있음이 부끄럽다고 마구 우는데, 친구의 눈엔 눈물이 아니라 피 같은 것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때, 탈북자들이 떠올리는 고향은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그 땅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들은 굶어죽고, 얼어 죽고, 맞아죽었는데 나는 살아있다는, 살아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그 자괴감이 우리 모두를 슬픈 과거 속에 처박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향은 슬픔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명절 때마다 고향으로 달려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는 떠올리기조차 실어지는 게 고향이기도 합니다. 길은 있어도 갈 수 없는 곳,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들은 있어도 저들이 과연 나를 그리워 할까가 근심인 그 땅...탈북자인 내게 고향은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잊으려하면 할수록, 기억에서 지우려 하면 할수록 고향은 언제나 내 곁에 머무르며 멀어지려는 내 마음을 꽉 부둥키고 있습니다. 기억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어느 `한시도 잊으면 안되는 게 고향이라고...깊은 밤 꿈속에서조차 고향은, 네가 고향을 버렸다고 해도 고향은 결코 너를 버린 적이 없음을 날마다 속삭이고 있습니다.

이런 탈북자의 마음을 담은 시 한편을 소개하면서 두서없는 저의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제목은 ‘동작대교 위에서’이고 2006년 3월,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작품으로 내 놓았던 조촐한 시집 갈피에 끼워두었던 時이기도 합니다.

<다리 위를 걷는다. 강물이 비껴간다. 잿빛 연기 속에 질주하는 승용차들, 어디선가 굴러 온 휴지 한 조각이 광란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소리로부터 차창 속 번들거리는 눈빛들로부터 피할 길 없는 삶이 야속한 만큼 보고파지는, 그리워지는 옥류교 난간에 몸을 기댄다.

* * * 

모란봉 기슭, 내 고향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배고픈 사람들의 눈뿌리를 슬그머니 부여잡는, 그 식당 난간에 서면 손에 닿을 듯 한 거리에 東평양과 西평양을 잇는 옥류교’가 놓여 있답니다. 열두 개 교각 밑에 구슬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매일처럼 지나던 그 다리는 길이가 팔백 미터, 너비는 이십 이 미터, 흔치않은 승용차가 쌩쌩 달리곤 했죠. 그래서인지 학교 갈 땐 어머니가, 집에 갈 땐 단임 선생님이, 늘 서있던 그 다리, 커서 군대 갈 땐 옆 집 옥이가 내손 꼭 잡고 서있던 다리랍니다. 그 다리 머릿돌 한구석에 이름 석 자 적어놓았다가 관리원 영감한테 뒤통수 얻어맞던 기억도 있고, 친구들과 옹노를 놓아 강 비둘기 잡아먹던 기억도 있는, 멀리 멀리 떠날 때는,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던 그 밤엔 무슨 놈의 다리가 그리도 길든지...예까지 닿아 있다면 믿으시겠나요.


2017년 5월 2일 김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