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북한운동연합
 
권위 없는 권력의 광기
 글쓴이 : 옮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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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상식과는 달리, 권위와 권력은 정반대편에 있다. 권위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민심이고,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강제력이다. 권력이 권위를 잃으면, 지배자(명령을 내리는 자)와 피지배자(명령을 받는 자) 사이에는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증오의 칼이 벼려진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권위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오늘날도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대체로 코란이 법률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민심은 세속의 권력자보다 종교 지도자나 족장을 높이 떠받든다. 따라서 세속의 권력이 종교의 권위와 충돌하면, 이슬람 신자는 기꺼이 후자를 따른다. 케말 파샤에 의해 정교가 분리된 터키에서조차 과거로 회귀하려는 코란 세력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권위와 대한민국의 민주적 권위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권력은 조선시대 왕과 대한민국 대통령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 민주잣대(polity Ⅳ)에 따르면, 조선시대는 평균 +1으로서 왕조로서는 상당히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드골이 +5였고, 박정희의 3공화국이 +3이었다. 북한은 가장 좋았을 때가 –7이었고(중국은 1978년 이후 줄곧 –7), 1967년 –9로 떨어지더니 1995년부터 줄곧 –10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2012년부터 +9를 유지하고 있다. 경제에 이어 정치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완전한 민주(full democracy +10)에 어떤 나라보다 단시일에 근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현재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 권력은 분산되어 있으나 분산된 권력이 스스로 권위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법을 빙자하여, 촛불의 협박에 굴복하여 권력의 몽둥이를 조폭처럼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간파했듯이, 왕정이라고 해서 같은 왕정이 아니고 민주라고 해서 같은 민주가 아니다. 세종대왕과 연산군이 같은 왕이 아니듯이, 선군(先君, king)과 폭군(暴君, tyrant)으로 선명히 갈라지듯이, 선거로 선출되었다고 해서, 정통성이 있다고 해서, 대통령이나 총리가 같은 대통령이나 총리가 아니다. 똑같이 선거로 선출되었고 똑같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지만(숫자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긴 하지만), 링컨과 히틀러는 천사와 악마만큼 다르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링컨은 권위를 얻었지만 히틀러는 권위를 잃었다.

그렇다면 권위도 보편적 잣대로 계량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에 사람들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아무리 열렬히 지지했더라도 그것이 집단광기에 의한 것이라면, 거짓 권위에 지나지 않는다. 전후에 헛소리를 했지만, 하이데거도 히틀러에 아부하고 학문의 권력을 차지한 자다(히틀러의 철학자, 이본 셰라트). 당대의 지성인들이 곡학아세에 앞장서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일반인을 대중매체로 세뇌하면 대명천지 민주 국가에서도 얼마든지 거짓 권위가 횡행하게 되고, 권력은 그에 빌붙어 방자해지고 민주는 형해화(形骸化)된다.

극에서 서로 만난 우익 전체주의 파시즘과 좌익 전체주의 공산주의는 난형난제(難兄難弟)이지만, 평가는 상당히 엇갈린다. 전자는 전 세계에서 확실하게 단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악의 상징으로 지속적으로 상기되고 있지만, 후자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가 비판에서 사실상 자유롭다. 특히 오늘날 polity Ⅳ에서 +10을 자랑하는 나라들에서, 개인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된 곳에서 그 자유를 방패삼아 부자(본인들은 아무리 부자라도 거기서 빼고, 촘스키나 백낙청 같은 자)에 대한 증오에 기초한 평등을 사회주의 천년왕국의 헌법 제1조로 삼는 사상이 횡행하면서, 서구 지성인들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동급으로 취급하길 애써 피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그저 러시아 제국의 차르 정도로, 모택동은 중국 통일 왕조의 황제 정도로 얼렁뚱땅 넘어간다.

한국에서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386운동권으로 대표되는 주사파(NL) 지성인들이 김영삼 정부에서 교두보를 마련하고 김대중 정부에서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노무현 정부에서 크고 작은 성(城)을 모조리 장악하면서, 아래로 시민단체와 학계, 문화계, 언론, 노조에서 위로 정부와 국회, 사법에 이르기까지 노른자위 권력을 거의 장악하면서, 사실상 권력을 독차지하면서, 1980년대 대학생의 의식화 작업을 초등학생 나아가 일반인까지 넓히면서 친일과 독재 단 두 단어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원초적으로 부정하고, 슬그머니 반일(反日)과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두 단어로 북한의 정통성을 은연중에 긍정하게 만듦으로써, 이제 권위는 자유민주와 법치, 인권과 태극기가 아니라 민족과 통일, 평화와 촛불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런 추상적이고 주관적이고 선정적인 명분은 김일성 공산왕조에게 6.25남침(민족통일)의 원죄와 인권유린(내재적 접근)의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안겨 주기에 이르렀다. 자연히 이름만 우익이었던 이명박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비정상화를 정상화하려던 박근혜 정부도 좌파의 권위에서 자유로운 인물은 정부와 여당에서도 찾기 어려워졌다. 내부의 적으로 둘러싸였다. 그 결과가 국사 국정교과서 5,565대 1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와 파면이다.

연평해전과 장갑차 교통사고는 거의 동시에 일어난 불행이었지만 끼친 영향은 정반대였다. 연평해전은 두 좌파 대통령 이하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철저히 외면했다. 반공반북(反共反北)의 횃불을 단 한 개라도 피우기는커녕 유가족만이 쓸쓸히 피눈물을 흘리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으로 무언중에 선포되어 삼엄하게 경계가 강화되었다. 일제 총독부가 독립투사 가족을 감시하고 연금했듯이! 반면에 효순과 미선은 민심의 촛불로 지피어 전 국민의 가슴에 반미(反美)와 미군 철수의 씨앗을 뿌렸다. 북한에서도 효순과 미선은 영웅이 되었다.

천안함 폭침과 세월호 해상 사고도 마찬가지였다. 전자는 북한과 하등 관련이 없다고, 심지어 미군의 자작극이라고 음모설을 퍼뜨리거나 최대한 선심 쓴다는 것이 고작 불행한 좌초 사고니까 하루 빨리 잊고 다 같이 생업에 몰두하자고 열 배 백 배 축소되었고, 후자는 선장이나 선주, 일선 관계자가 아니라 모든 게 천 리 밖 대통령 책임이라고, ‘전지전능한’ 대통령이 신통력으로 즉각 감지하지 않고 축지법으로 날아가지 않고 구중궁궐에서 7시간 동안 죽치고 앉아 내버려두어서 그랬다고 백 배 천 배 과장되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조난자에겐 끝없이 동정심을 짜내고(부모상도 대개 삼우제로 끝내건만), 붕대 손 대통령에겐 끝없이 증오심을 부채질했다.

5억 달러(4.5억 달러 현금, 0.5억 달러어치 물품) 조공(朝貢) 대통령에겐, 빨간 넥타이 대통령에겐 언감생심 상상도 할 수 없는 덮어씌우기 물귀신 작전으로 멀쩡한 사람도 자기 자식이 바로 어제 생죽음을 당한 듯 지난 3년 동안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치를 떨게 만들었다.

권위도 보편적 기준이 있다. 진실, 사실, 인권, 생명, 공감, 법치, 물증, 교차 검증이 바로 그것이다. 거짓, 허구, 고문, 죽음, 증오, 인치(人治), 심증, 일방적 진술에 바탕을 둔 권력 행사는 거짓 권위의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세뇌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양심에 우러나서 외치더라도 그것은 거짓 권위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이 거짓 권위에 편승하여 철두철미 이중 잣대로 자기편에겐 묵비권을 무한 보장하면서 무죄추정(presumed innocence)의 원칙을 최대한 적용하거나 아예 찾지도 않고, 반대편에겐 서슬 퍼런 정의의 이름으로 다짜고짜 오랏줄을 채워 입에 재갈을 물리고 포토라인에 세운 후 일단 구속부터 시키고 온 나라에 공포를 조성하면,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은 설령 촛불의 열 배가 되어도 엄정하게 공무방해죄로 잡아가면, 부지불식간에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이 아무리 뒤에서 악의에 가득 차서 수구꼴통(실은 정통우파) 죽여라, 열렬히 박수를 보내더라도, 권력은 좁디좁은 우물 안에서만 권위가 있지, 한 걸음 우물 밖에서 보면, 객관적 입장에서 보면, 전혀 권위가 없다.

그것은 민주화 수준이 -10인 북한과 하등 다를 게 없는 또 다른 독재다. 당당히 선거로 선출된 나치는 그렇게 탄생되었던 것이다./최성재

(2017. 3.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