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북한운동연합
 
5.18
 글쓴이 : maester
조회 : 712  
제목 : 5.18 광주사태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의 이야기 
 
[조갑제닷컴]  글쓴이 : 석종대  기사입력 :  2017.04.05  01:36
 
광주 사태를 몸소 겪은 공수부대원이 발표한 수기는 몇 편 안 된다. 여기에 소개하는 수기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광주사태 관련으로 구속된 후 자신들이 죄인으로 부당하게 취급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金治年씨가 쓴 것이다. 김씨는 당시 3공수여단 12대대 소속이었다. 개인의 체험으로 이 사건 전부를 규명할 수는 없으나 사건 실체를 올바로 인식하는데 도움을 준다.

지금은「내란목적 살인범」의 부하가 된 당시 계엄군 사병의 시각은 어떠했는지 글로써 피력하고자 한다. 시위대들이 영웅이 아닌 것처럼, 계엄임무를 수행했던 우리 역시 罪人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사태발발 원인을 정치적으로만 해석해 온 자금의 현실은 필자를 비롯한 많은 공수단 병사들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현지에 투입된 장병들은 정치와 무관했으며 임무수행의 버거움으로 인해 많은 희생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왜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전직 대통령도 구속되는 마당에 여론의 힘을 업은 현재의 상황에 맞서 누가 나서서 우리의 입장을 증언을 해줄 것인가. 아마도 그 당시 참여했던 우리 3공수 여단 장병 중 상당수는 직업군인으로 종사하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거나 전역한 사람들은 생계유지의 위협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자도 한동안 후자의 대열에 속한 사람이었다. 사업을 하던 중 결국엔 5공화국의 제도에 치어 연쇄부도를 맞아 파산한 상태이다.

그러나 내게는 파산이 오히려 홀가분한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누군가는 당시 우리가 피 흘리며 수행했던 일들을 제대로 전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야 그 일 중 하나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 모든 특전대원들은 계속적인 제보를 당부드린다.

필자는 무엇보다 광주사태의 시발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계엄군으로서 당시 시위대에 대한 시각은 부마사태에서 비롯된 점들이 많다. 필자가 소속되어 있던 3여단은 5여단과 함께 1979년 10월 18일 부산에서 진압을 수행했다. 계엄군 입장에서는 성공적인 작전 수행이었다.

그런데 부마사태의 진압경험을 가진 3, 5여단이 광주에 처음부터 투입되지 않았다는 점은 눈여겨 볼 만하다. 직접 경험이 없는 7여단 병력들의 초기 과잉진압은 3, 5여단의 작전 수행 방식을 외형적으로만 답습해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거기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3공수여단은 당시 성남 비행장에서 C-123기를 타고 부산으로 공수됐다. 우리에게 정확한 작전 명령이 하달된 것은 비행기 안에서였다. 지휘관은『현재 부산지역에서는 매우 심각할 정도의 데모가 일어나고 있으니 우리는 평소 훈련대로 충정작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간결한 명령을 했다.

부산에 도착한 우리는 東亞大 운동장에 숙소 텐트를 치고 무력시위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장비는 소총과 70cm의 진압봉 및 매우 거추장스러운 투석망과 방독면이 전부였다. 우리는 2.5t 군용 트럭에 탑승해 하얀 장갑을 끼고 부산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 다녔다. 이것은 공수부대의 위압감을 시민들에게 인식시켜 주기에 충분한 시위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도 우리 차량을 향해 간간이 투석하는 데모자도 있긴 했지만, 우리는 단지 정면만을 응시한 채 약 3시간 여에 걸친 시내 운행을 끝낸 뒤 주둔지에 돌아와 곧바로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이내 부산 시청 근방에 배치되었는데 이때 여단장(당시 최세창 준장)은『명령없이는 어느 대응도 하지 말라』는 매우 강도 높은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가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거점을 지키고 있는 동안 오후 8시가 넘자 점차 시위대 수는 줄어만 갔다.

그리고 오후 9시가 넘어 불과 3~4백 명의 시위대가 남았을 무렵 비로소 시위진압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 진압작전은 20~30분 만에 끝날 수 있었다. 이때 우리가 시위대에게 곤봉으로 타격을 가한 것이 7공수 여단 병력이 광주에서 가한 것보다 약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때려서 진압하지 않을 수 없다면 단번에 결판을 내야 했으니 강하고 약하고를 가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광주와 달랐다. 부산의 경우 간혹 산발적인 시위는 있었지만 매우 순조롭게 진압되어 갔다. 이렇게 이틀 정도에 걸쳐 실시한 진압작전은 매우 효과적인 반응이 나타나 더 이상 시위는 발생하지 않았다.

여기서 부마사태와 광주사태의 진압작전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내가 진압작전에 참가한 부산의 경우와 5공수여단의 마산 진압의 경우 낮에는 절대로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시민들과의 충돌이 적었다는 점이다. 주로 밤에 이루어진 주동자급 데모대에 대한 진압은 시위대의 주력 시위 인원이 줄어든 상태여서 신속한 작전이 가능했다. 비록 진압봉으로 타격을 받아 유혈이 낭자했어도 광주에서처럼 대낮에 구경하던 사람들을 흥분시킬 정도가 아니어서 부산의 경우 시위대는 급속히 붕괴했다는 점이다.

둘째, 부마사태 당시 체포된 시위자들은 민간인이었기에 즉시 경찰로 인계하였으므로 시민과 軍의 직접적인 감정충돌을 회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주의 경우 인계받을 경찰도 제대로 남아 있지 못했다.

광주의 경우 대낮에 유혈 진압을 실시했다. 이것은 광주 전 시민의 공분을 야기한 행위였다.

어찌 자기 자식이나 또는 친구가 눈앞에서 피를 흘리는데 분노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당시 한국 사회가 시위대와 진압군의 존재를 필요악처럼 인정한 사회였다고 본다. 데모도 있어야 했고 국가 안보와 사회질서도 지켜야 했던 시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압만이 무조건 잘못이고 시위대는 무조건 영웅이라는 식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결과만을 놓고 지금처럼 진압 자체를 부정해 버리면 우리 같은 군인들은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란 말인가?

필자의 주장은 진압군측의 진압 미숙이 법정에 섰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시위대에게도 책임은 있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덮어버린 채 정치적으로만 몰고 가는 작금의 사태는 훗날 두고두고 한국사회의 갈등 요소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한편, 부마사태가 가라앉은 다음 3공수여단이 서울 주둔지에 광주로 투입된 것은 1980년 5월 20일 새벽이었다. 우리는 오전 1시에 5개 대대가 청량리 역에 집결해 열차편으로 광주로 향했다. 우리가 출발할 무렵 광주는 이미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작전을 수행중이었다.

오전 7시에 광주역에 도착하자 7공수 병력 일부가 역 광장에 주저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매우 피곤하고 지친 표정이었다. 이미 부마사태 경험을 한 우리는 그들에게 안됐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만큼 우리는 느긋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전남대학교로 진주했고 인근 부대에서 가져온 식사를 마치고 곧 시내로 진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참여한 3공수여단 병력 1천3백92명은 전남대학교의 강당(체육관일 수도 있음)에 모여 최세창 준장의 훈시를 들었다.

『지금 광주 지역은 부마사태와 달리 매우 심각한 상황이니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명령없이는 절대 대응하지 말라. 특히 용공분자가 합세해 더욱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으니 모든 지휘관과 장병은 매우 신중한 진압 작전을 전개해야 한다. CS탄(개인휴대용 최루탄)과 E-8 발사통(64연발 다연장 최루탄통)외에는 모든 것을 사용금지하며 아울러 명령없이는 어떤 대응도 하지 말라』는 요지였다.

우리가 전남대학교에 처음 진주했을 당시 대학 교정 곳곳에 쓰여져 있는 대부분의 구호는 붉은 글씨였다 그 내용은「김대중 석방하라」「전두환 물러가라」「농민수탈금지」등. 필자를 비롯한 부대원들은「용공분자」의 활동이라고 믿었다. 1987년 이후 대학가에 나붙은 구호들이 붉은 색으로 써 있고 북한의 주장과 동일한 내용이 게시되더라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내세웠던 정국이었던 만큼 대학가에 나붙은「붉은 색 구호」는 그만큼 우리들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이것은 시위대가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김대중씨를 석방하기 위해 시위를 했다 하더라도 굳이 붉은 색을 사용했어야 했는지, 게다가「농민수탈금지」등 당시로서는「용공」이라고 오해를 받을 일을 자초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구호들 가운데 나와 같은 하급장병들에게는 생소한 이름도 있었다. 다름 아닌「전두환」이었다. 우리는 그 당시「전두환이라는 사람이 군부의 실세구나」하는 정도로 생각했지 그가 우리 부대를 지휘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휘계통상에 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것은 진압군인들과 전두환씨와의 관계설정이 현실적으로는 이만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무렵 우리에게는「내가 지키는 이 국토에서 어떠한 용공적인 준동은 용서할 수 없으며 조국을 지키겠다」는 특수전 부대의 군인정신만을 가졌을 뿐이다. 잠시 그 무렵 우리 부대의 인적 구성을 살펴보자. 광주에 투입된 3공수 12대대는 장교 50명에 사병이 2백50명 정도였다. 이중 장교의 학력을 보면 김완배 대대장과 작전참모, 본부중대장을 비롯 약 4명이 정규 육사 출신이었고 ROTC 출신이 약 8명이었다. 나머지 장교들은 3사관 학교 출신들이어서 장교들이 대학가 문화를 제대로 인식할 여지는 없었다고 보여진다. 사병 2백50명 중 상사가 25명 정도 중사가 약 80여명에 하사가 약 1백20명 정도며 일반 사병이 25명 정도 되었다. 하사관들은 대부분이 고졸 정도의 학력을 가지고 있으며 대학(2년제 대학 포함)을 접해 본 이는 10여명이 채 안된 상황이었다.

첫날 우리 부대는 식사를 마친 후 곧 전남도청 부근으로 배치되었다. 이때 대대 주임상사, 보급병, 그리고 작전 선임하사와 나는 전남대 교정에 남아 대대 작전 상황일지를 정리했으며 아울러 현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발포에 사용된「경계용 실탄」을 관리했었다. 공수 부대는 예나 지금이나 훈련시에는「對간첩작전용」또는「경계용」으로 실탄을 탄약상자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 이 탄약상자는 대대본부에서 관리한다. 지금도 각지에서 훈련하는 공수부대의 대대본부에는 이 탄약상자가 있다. 그러나 대대본부에 보관한 것이지 개인에게 지급되는 일은 적어도 5월 20일엔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 병력이 투입된 당시에는 유일하게 대대장만 권총실탄을 가지고 투입되었고, 나머지 전 대원에게 지급된 장비는 실탄없는 총, 대검, 70cm의 진압봉, 방독면, CS탄 2개 그리고 철모 앞에 쓰는 방석망이 전부였다. 이중 행보에 가장 불편을 주는 것이 바로 M-16과 방독면이었다. 그 당시 지급된 방독면은 오히려 최루탄 가스를 들이마시는 형편없는 저질 제품이었다.

전남대 교정에 위치한 대대본부에서 P-77 무전기를 담당하던 나는 대대 작전 상황을 기록해 갔다. 내가 속한 3공수 12대대는 광주시청에 대기하면서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했다. 그날 오후 3시께까지의 상황은 그저 대치 상태였다. 이때 여단 본부를 통해 들은 당시 상황 분석은「초기 투입된 7공수단에서 매우 과잉진압을 했다. 공수부대에 대한 반감이 심하니 수습이 쉽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벌써 확대조짐의 불씨가 번져가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경상도 군인만 내려왔다」는 유언비어가 전 광주지역에 퍼져나가고 있으며 그 외에「공수부대가 유부녀를 겁탈한다」느니「술을 먹거나 환각제를 맞았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사복경찰로부터 접수되기 시작했다. 이런 유언비어는 결국 상대방의 감정을 극한 상황으로 끌고 가기에 충분했다.

전라도 출신인 대대장은 지역감정을 악용한 유언비어를 보고 받고『경상도 출신 군인은 대열 후미에 배치시켜 광주시민을 자극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가까운 시위진압 현장에 투입되지 않은 나는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들으면서 코웃음 쳤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우리가 유부녀를 겁탈한다? 전시와 똑같은 상황에서 대열을 이탈해 그런 행위를 저지른다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뜻하는 것인데 어느 정신 나간 친구가 대열을 이탈할까. 특히 일개 중대가 장교 2명 사병 10명으로 구성된 12명의 최소 인원 단위에서 그러한 행위가 가능할까.

더구나 그날 가장 과격한 시위가 벌어질 무렵 우리 부대원 대부분은 저녁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급식차량이 시위대에 밀려 부대원에게 공급되지 못하고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지치고 피곤한 대원들에게 환각제나 술이 공급될 리 만무했다.

무전을 듣고 상황일지에 기록하던 필자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러나 16년이 지난 지금 이 황당한 유언비어들은 아직도 활개치고 다닌다. 더구나 이런 내용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자신들도 광주사태의 영웅에 포함된다고 착각하는 듯하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유언비어를 정리하고 있을 즈음 상황실에는 점점 과격한 상황으로 치닫는 보고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시위대 수가 매우 불어나고 있다.
-상대편은 각목,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했다.
-투석으로 인한 경미한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CS탄이 다 떨어졌다.
-E-8 최루탄 발사통을 더 지원해 달라.
-최소한의 자위방어를 해야겠다.

이런 보고들은 여단본부로 올라갔고 곧 이어 여단본부에서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저지선을 넘는 시위대에 한하여 자위 방어 개념으로 시위 진압작전을 개시하라』
그러나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무전기에서는 계속 상황보고가 흘러 나왔다.

-모든 최루탄이 다 떨어졌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우리 대대가 담당한 지역의 시위대 수는 5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모든 부대는 흩어지지 말고 집결하라.

20일 오후 7시께 우리 12대대는 광주역에 있던 3공수 15대대를 지원하고 KBS 광주방송국을 보호하라는 여단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우리 부대는 광주역으로 이동하여 15대대와 합류했다. 어둑해질 무렵 드디어 수적으로 매우 열세인 우리 부대가 밀리는 상황을 계속 보고해 왔다. 악몽을 꾸는 듯 했다. 우리는 대한민국 최강의 부대라고 늘상 자부할 만큼 강도 높은 훈련과 시범을 보인 부대였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가 밀리고 있었다. 교신 내용은 매우 험악하게 변해갔다.

-차량들이 돌진해 오고 있다.

오후 8시께 차량돌진 사태가 연이어 접수됐다. 그러다가 밤 10시가 될 무렵 드디어 피해상황이 접수됐다.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상자는 16대대의 한 중사다.
-우리 대대원도 차량에 깔려 부상당했다.

당시 차량에 깔려 사망한 군인은 정관철 중사(사망 후 상사로 특진됨)였다. 그는 전역 명령을 받고 한 달 후 제대할 몸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있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동료 하사관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부상병이 생겼다는 무전을 받은 지 20여 분이 지난 후 부상자들이 후송되어왔다. 한 사람은 차량에 깔려 다리를 다친 6지역대 張하사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갑자기 차량 한 대가 돌진해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상당했다고 했다. 張하사의 말에 따르면 차량은 지그재그로 진압군을 향하여 마구 돌진해 왔고 그에 따른 부상자가 속출하자 부대원 모두가 겁을 먹고 피하기에 급급했으며 진압 또한 매우 과격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張하사와 함께 실려온 두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그들은 경상도 번호판을 단 화물트럭의 운전기사와 조수였는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다가 경상도 차량이란 이유로 시위대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공포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구타를 당했는지 옷도 찢겨지고 피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 무렵 무전기에서 위급한 상황에 처한 초급 지휘관들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
-옆 대대와 접촉이 안되고 있다.
-공포탄을 달라.
-최소한도 차량을 저지할 수 있는 실탄을 달라.

너무나도 다급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였다. 이미 최루탄도 떨어진 상황이며 진압봉으로의 대처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약 20여 분이 지난 후 공포탄 및 실탄을 사용해도 좋다는 여단본부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단 유의할 점 몇 가지 사항이 전달되었다.

(1)실탄은 중대장 급 이상에게만 30발씩 지급할 것(공수부대 1개 대대에는 4개 지역대에 4개 중대씩 16개 중대가 있었는데 이를 팀이라 부르며 팀장이 곧 중대장이며 대위 급으로 편성되어 있다)
(2)돌진해 오는 차량의 저지용으로만 사용할 것
(3)인명을 향하여 절대로 쏘지 말 것
(4)공포용 이외의 용도에 사용할 시에는 엄중처단한다.

대충 이런 요지와 함께 실탄지급을 명령하는 電通이 날아왔다. 작전병이었던 필자가 이 전통을 예하부대에 하달했으므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항들이다.

한편, 우리 대대에서는 소유하고 있던 탄약상자를 M-16 탄약 1상자와 예광탄 및 공포탄 각 1통씩을 싣고 여단 본부 병력과 함께 우리 대대의 작전 지역으로 수송했다.

우리 부대에서 지급된 실탄은 두 곳으로 나뉘어 전달됐다. 한 곳은 16대대가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신안동 굴다리 쪽이었다. 본부대 병력 20여 명과 정보 참모가 경계용 실탄 1백여 발을 이들에게 전달했다. 여단 작전 참모와 함께 출발한 실탄 운반조는 광주역으로 향하면서 수백 명의 시위대와 부딪쳤다.

운반조는 시민군들의 공격에 힘겹게 통로를 확보해 12, 15대대가 있던 광주역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무렵 3공수 11대대는 금남로 신탁은행 공터에서 시위대에 포위되어 있던 중 여단장의「광주역 집결」이란 명령을 받고 최루탄을 발사하며 포위망을 뚫고 이동중이었다. 이들은 광주 시청에 몰려 있던 13대대와 합류한 다음 11시 30분께 가까스로 광주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 조그마한 타이탄 트럭에 확성기를 달고 선무 방송을 하며 돌아다니던 여자가 있었다(나는 훗날 이 여자의 이름이 전옥주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여자의 선무 방송내용은 내게 종합되어졌다. 그 내용은 이렇다.

-광주 도청에서 시민 두 명이 살해되었다.
-광주 시민이여 봉기하여 무자비한 공수부대원을 몰아내자.
-광주역 부근에서 또 시민이 살해되었다.
-저들은 우리를 향해 절대로 총을 쏘지 못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궐기하자 광주 시민이여.

이 기록을 정리하는 사이 동료들의 얼굴 표정을 보니 그들은 전옥주란 여자의 선무 방송에 의해 대단히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선무공작은 특수전으로 단련된 우리들을 오히려 겁먹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대원들은「저 여자 때문에 더욱 더 상황이 악화되고 있으니 저 여자를 죽여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다. 당시 중대장이던 孫대위에게 한 하사관은「팀장이 못 쏘겠다면 총을 내게 달라. 내가 쏘아 죽이겠다」고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끝내 그 여자를 향해 사격한 군인들은 없었다.

우리가 속한 부대는 북한의 한 지역을 대상으로 늘상 훈련을 한다. 그곳에 침투해 선무공작을 하고 때로는 시위를 일으키며 선무방송과 삐라를 만들어 뿌리는 임무도 수행한다. 한마디로 비정규전을 하는 부대이다. 그런데 선무방송하는 시민군에게 심리적으로 위축당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광주사태는 시민군과 대한민국 육군과의 비정규전이었다. 거기서 비정규전 전문가인 군인들이 아마추어인 시민군들에게 깨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였다.

5월 20일 3공수여단의 광주 첫날 상황은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아침에 광주역에 도착했을 때 누구 하나 이런 사태가 올 줄 몰랐다. 모두가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듯했다. 우리 부대는 광주역에 집결해 시위대를 해산시키다가 5월 21일 02시께 KBS를 지키던 31사단 경계병력들과 사복 경찰관 4~5명과 함께 전남대로 철수했다. 철수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 직후 광주 KBS 방송국이 불타오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날 광주역에서의 진압을 두고 지금까지「학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 필자는 유감이다. 당시로서는 민간이 얼마나 총으로 사망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학살」이거나「무차별 사격」이었다면 적어도 수십 내지 수백 명이 죽거나 총상을 입었어야 말이 된다. 그 날 내 동료들의 말을 들어봐도 그들은 사람을 향해 쏜 것이 아니라 위협용 사격을 했었던 것이다.

실제로 1995년 7월에 발표된 검찰 조사에서도 이 날 밤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4명이었고 부상자가 6명이었다. 3공수여단 하사관 1명이 차량에 깔려 사망했고 3명이나 부상당한 이후 총을 가진 군인들이 작심하고 사격했다면 왜 4명에 국한됐을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가 살인자로 몰려야 하는 이유를 필자는 모르겠다.

혹자는 광주사태의 진압을 일반 보병부대에 맡기지 않았음을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처럼 자제할 수 있었을지 필자는 의심스럽다. 눈에 불이 튀는 상황에서도 무차별 난사를 하지 않았기에 4명만이 불행한 죽음을 겪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서로 다른 입장에 설 수 있다고 본다. 우리라고 자원해서 진압군이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시민군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진압자체를 두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시각은 진정 유감이라 할 수 밖에 없다.

한편, 이날 현지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의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죽음 앞에 직면한 부대원들이 전남대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모두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은『車 온다』는 소리였다. 예측할 수 없는 지그재그식 운전으로 돌진해 오는 차량 앞에 서 본 사람만이 체감할 이 공포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군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부 짓궂은 하사관이 녹초가 되어 바닥에 퍼져 있는 동료들에게『車 온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한 명도 예외 없이 잠에서 깨어나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곳으로 몸을 날리며 긴장했다. 우스개로 한 장난은 동료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듣는 것으로 끝났다. 우스울지 모르지만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정반대의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들은 하루 종일『車 온다』는 경고에 사력을 다해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시위대의 차량급습으로부터 피해다니다 돌아온 그들에게「차량 돌진」은 일종의 노이로제가 되어 있었다.

5월 21일 새벽에 우리는 일부 경계병력을 제외하곤 강의실에서 눈을 붙였다. 새벽 5시께였다. 사이렌 소리가 났다. 시민들이 끌고 온 소방차였다. 전남대학교를 에워 싼 그들의 모습은 우리를 곧 삼켜버릴 것 같은 성난 모습이었다.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시민군측에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시민군도 무장했다는 電通과 함께 全대대원에게 실탄 10발씩 지급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부대 내에 남아 있던 탄약상자들이 본격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시민군들은 소총으로 무장한 채 군용 지프차를 몰고 태극기를 흔들며 정문 앞까지 왔다 갔다 했다. 그들은 복면을 하고 어깨 위에 총을 세운 채 하늘로 공포를 쏘고 다녔다. 그들도 우리를 향해 함부로 사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총이 카빈이라는 걸 그때야 알게 됐다.

이때 처음 일반 대대원에게까지 실탄이 지급되었으며 이는 곧 상대편에 대하여 사격도 가능하다는 명령과 다름없었다. 멀리 대치한 그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들 중에는 예비군복을 입은 자도 있었다. 그 당시 공수부대 복장은 예비군복과 비슷했다. 뒷날 광주사태에서 공수부대원에 의한 성폭행 등 파렴치한 행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피해자들이 예비군복을 입은 사람들을 공수부대원으로 착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필자에게는 당시 교문 앞에서 본 예비군복 차림의 시민군들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가 광주에 도착한지 만 하루가 지난 5월 21일 오전은 전남대 교내에서 하루를 다 보낸 날이었다. 새벽 5시부터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든 시위대들은 트럭,소방차,버스,장갑차 등을 몰고 왔다.

이 무렵 대치상태라고 표현됐지만 사실상 우리는 포위되어 있었다. 시위대들은 이미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을 한 상태였다. 3공수의 1천4백여 명에 비해 그들은 수십배의 병력을 갖춘 셈이었다.

이 날 낮 12시께 시위대는 차량을 돌진해 정문을 밀고 들어왔다. 우리는 한동안 전남대 정문을 남겨둔 채 뒤로 3백여m나 후퇴해야 했다. 겉으로는 위엄있는 공수부대였지만 속으로는 죽을 맛이었다. 오후 2시께 시위대를 밀어붙이며 광주 교도소로 철수할 때까지 치열한 최루탄 공방전을 계속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가 장갑차와 트럭을 우리들에게 돌진시키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발포를 해야 했다. . 이것이 전남대에서 3공수여단의 첫 발포였다. 차량을 저지시킨 대원들은 그 길로 도망가는 시위대를 民家에까지 쫓아가 연행했다.

훗날 알게 됐지만 전남대 정문 앞에서 발포가 있고 난 뒤 시위대 4만 여명 중 세 명이 총상으로 사망했고 세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체포, 연행된 시위대 중 두 명은 광주교도소로 이송된 이후 타박상으로 사망한 채 발견됐다고 한다.

죽은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다 같이 불행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특히 전남대 정문에서 사망한 사람 중 한 사람은 임신 8개월된 여자로 밝혀졌다. 위협사격한 실탄이 그녀의 목숨을 앗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임신 8개월이 된 몸으로 왜 그 아수라장에 서 있었던가.

그러나 그녀의 죽음을 두고 지금까지「공수부대원들이 임신한 여자까지 총으로 죽였다」고 주장하는 일은 죽은 자의 시신을 빌려 선전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날 발포한 장병 중 그녀를 인지하고 조준사격했던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일을 두고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대다수 국민들이 공수부대 전체를 잔학한 집단으로 만들었다.

나를 포함한 공수부대원들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힘이 빠진다. 우리는 戰時가 되면 적진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접을 받으면서까지 적진으로 뛰어들어야 하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고된 훈련을 마다 않고 받아 왔던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시민군들과 대치하던 중 광주 교도소를 습격하려 하고 있으며 아울러 광주 교도소에는 사상범이 많이 수용되어 필히 사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받았다. 이때 우리에게는 약 20여 명의 시민군들이 잡혀와 있었다. 그들 대부분 웃옷이 벗겨진 채 등에 매직펜으로 운전, 시위 등 글씨를 써 분류해 놓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차량과 장갑차를 몰고 돌진해 오다가 잡혔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부상병, 그리고 일부 극소수 병력이 차량을 타고 먼저 광주 교도소로 이동했다. 우리도 곧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도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5월 21일 오후 2시께였다. 이 당시 차량으로 이동한 팀에서는 연행 시위대를 트럭으로 후송했다.

이 싸움은 애시당초부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시위대에게는 우리가 확실한 적이었지만 우리에게 시위대는 확실한 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흔히 말하는「일부 주동자」를 제외하고는 시위대 전체에 대한 적대감을 우리는 가질 수 없었다.「일부 주동자」라는 것도 추상적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도청 앞이나 전남대 정문에서 우리가 그토록 포위당하고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았지만 연발 사격 등 밀집된 시위대를 향해 난사를 하지 않은 것은 진압군 모두의 심리 저변에 상대방에 대한「인식 보류」라는 여백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민군 모두가 태극기에 애국가를 부르며 차량돌진을 해 오면 도대체 누가 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사격을 자제하다가 비로소 주동자급이란 사람들을 연행하니 그동안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을 것이다. 물론 당한 사람들에겐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그 상황에서는 우리 쪽도 마찬가지였다.

전남대를 떠난 우리는 도보로 30여분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2열 행군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후미에서『車 온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2.5t 군용 트럭 2대가 LMG 30 기관총을 쏘아대며 달려왔다. 고속도로 양 쪽으로 나누어 행군하던 우리들은 모두 갓길에 엎드렸으며 누구 하나 대응 사격을 할 수 없었다. 차를 향한 사격은 반대편에 있는 동료부대원을 향하여 사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차량은 선두대열로부터 사격을 받았으나 무사히 빠져 달아나 버렸다.

우리 부대는 서둘러 광주 교도소에 도착하였고 우리 대대는 교도소에서 정문 방향으로 우측 그러니까 광주 시내를 향하여 호남고속도로와 인접한 부분까지 배치되었다. 한편 인접 대대였던 3공수 15대대는 교도소 앞 주유소에 도착해 31사단과 임무 교대 중 카빈으로 무장하고 발포하며 달려오는 고속버스 2대로부터 기습을 당해 대원 한 명이 부상을 당했다.

곧이어 헬기가 날아왔고 헬기에서는 쌀과 약간의 탄약이 내려졌으며 부상병들을 후송하였다. 그리고 곧 합수부 요원들이 와 잡혀온 시민 20여명을 인계받아갔다. 인계된 시민군들은 상당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특히 장갑차에서 기어 나온 시민군은 그때까지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는데 그의 등에는 「운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매우 심하게 구타를 당한 뒤 후송됐다. 장갑차는 한동안 공터에 세워져 있었다.

필자가 확인한 그 장갑차 속에는 주먹밥 두어 개와 소주병 그리고 태극기가 들어 있었으며 20대 전후로 보이는 그 사람은 그때까지 만취되어 있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가 지르는 소리는『대한민국 만세, 날 죽여라 이놈들아』등이었는데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양쪽 다 대한민국을 위한다며 생지옥을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들을 연행, 조사한 합수부 요원들은 그들을 사주한 사람들을 어째서 밝혀내지 못하고 침묵하는지 모르겠다. 필자를 포함한 당시 계엄군들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은 대체 누가 저들을 그토록 광분시키며 조직적으로 시위에 합류토록 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대부분 첫날부터 비롯된 과잉진압으로 公憤에 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란 설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상황을 자세히 겪은 사람들은 이런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이 장갑차를 탈취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외국 군대도 아닌 국군에게 달려든 것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가 노획한 차량에는 술병이 나뒹굴지 않은 차량이 없었고 우리에게 체포된 운전자들도 구체적인 동기를 말한 적이 없었다. 아직도 내게는 이 점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한편, 우리가 교도소에 도착해 방어진지를 구축할 무렵인 오후 5시께 지프차 1대와 버스 1대가 우리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들 또한 무장을 하고 우리를 향해 총을 발포했으나 우리들 중 총에 맞은 병사는 없었다. 총소리에 민감하고 즉각 대응자세를 제대로 훈련받은 병사들이어서 그들과 차이가 났을 것이다. 이 교전 끝에 버스만 그대로 돌아갔고 지프차는 고속도로 위에 총격을 받은 채 멈추어 섰다. 우리는 30여 분 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자 우리는 지프차로 향했다. 가보니 그 속에는 2명의 젊은 생명이 태극기를 감싸고 총을 든 채 죽어 있었다. 시민군들이 몰고 온 차량 모두가 그런 모양인지는 모르겠으나 지프차 안에도 소주병과 김밥, 주먹밥이 탄창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그 주검들은 여단 본부 행정병들이 사진을 찍고 가마니로 묶어서 교도소 뒤편으로 옮겨갔다. 이것이 아마도 교도소 부근 암매장 說로 번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광주사태 진압 도중 계엄군은 사상자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사진촬영을 다 해 두었다. 필자는 이 작업을 수행한 요원들과 대부분 함께 행동했었다. 사진을 찍고 나면 근처에 가매장한 후 지도에 표시를 하고 푯말을 세워 두었다. 이 시신들은 사태 종결 후 다시 발굴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사태 종결 후 나는 11공수대원 한 사람의 주검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그는 시민군에 의해 처참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민주화 항쟁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이 날 저녁 우리에게는 처음으로 식사가 제공되었다. 식사라고 해 봐야 한 덩어리 주먹밥과 새우젓 등이 전부였지만 매우 맛있게 먹었다. 그때까지 우리 부대원은 특전식량이라는 쌀, 밀, 초콜릿으로 압축되어진 소량의 비상식량으로 허기를 모면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지 얼마 안되어 또 다시 버스와 군용트럭이 교도소 정면 개활지 앞 도로로 달려왔다. 교전이 시작되었으며 이윽고 어둠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이 시각에 외각 봉쇄를 맡았던 인접 대대에서는 픽업차량을 타고 교전중인 지역을 지나던 주민 4명이 총상을 입었다. 그 중 2명은 사망했다. 그런데 이들이 입은 총상은 카빈이었다. 시민군의 사격으로 민간인이 죽은 것이다. 이것을 두고「시민군이 양민을 학살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주사태에서 빚어진 여러 사건들은「공수부대가 양민을 학살했다」고 하기엔 무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조사는 일방적으로 이뤄진 느낌이 많다. 게다가 결과는 광주시민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쪽으로만 하는 것 같다. 이것이 무슨 공정한 조사인가.

이날 밤 우리들은 은폐된 자신의 개인호를 벗어나지 않은 채 다음날인 5월 22일 새벽까지 5~6차례의 교전사격을 계속해야 했다.

5월 22일 아침. 날이 밝아오자 우리들 앞에는 총탄 자욱으로 누더기가 된 버스 1대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버스는 방어용 모래주머니를 양쪽으로 쌓아 일종의 장갑차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닥 이곳 저곳에는 피가 흘러 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부상을 당한 채 퇴각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M-16으로 총상을 입고 도주하다 도랑같은 곳에 쓰러져 죽었다면 그 시체를 두고 어떤 말들이 쏟아질 수 있을까.「공수부대가 사람을 죽여 도랑에 처박아 놓았다」고 할 것이다. 혹은 시민군 동료가 철수도중 죽어 한 시민군이 이를 파묻고 훗날 그 유해가 다른 사람에 의해 발견된다면「암매장한 시민군 발견」이 될 것이다.

필자는 교도소를 습격한 버스와 군용차량에 탑승했던 그 시민군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사는지 궁금하다.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분명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서로 대치했던 동일한 사건의 당사자들이다. 서로가「사실의 확인」을 위해 신분을 드러내놓고 만나 조사하는 하는 심정이 간절하다.

검찰도 이런 조사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국방부조차 군인들의 사기 진작이나 진실을 위한 노력에는 한 마디 대응조차 않는 작금의 사태를 보며 누군가는 제대로 진실을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지금과 같은 인민재판식 분위기에서는 이런 말을 하면 맞아 죽을지도 모르지만..

5월 22일 오전 우리 지휘관들은 상부로부터 매우 심한 질책을 받았다.

『밤새 교전을 했는데 한 사람도 잡지 못하고 실탄만 쏘아댄 것이 어디 공수부대라 할 수 있느냐』
『앞으로 저격 중대만 선정하여 사격통제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한 점은 나를 비롯한 약 반 수 정도의 동료 부대원들은 광주 비행장으로 철수할 때까지 단 한 발의 실탄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가 실탄 10발을 모두 반납했다는 것이다. 실탄을 쏘지 않은 필자의 경우는 적은 숫자의 시민군과 교전하면서 굳이 작전병이었던 나까지 가세할 이유가 없었던 점이 가장 컸을 것이다. 대부분 직업군인들로 편성된 공수부대에서 나와 같은 사병은 막내 동생 취급하기 일쑤였다. 그런 만큼 그들이 위험한 상황에 앞장서서 대처했던 것이다.

또한 사격대상의 목표상실도 있었겠지만, 몇 몇 부대원을 제외하곤 거의 이틀 동안 수면을 취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산발적인 총소리를 제외하곤 개인 참호 속에서 수면을 취하기 바빴다. 이틀째 되던 날은 사격 팀을 별도로 편성하였기에 총을 발포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5월 22일 아침 교도소 정면 도로에 서 있던 버스 1대를 견인해 왔으며 조금 후에도 또 다시 총성이 났다. 교도소 정면 도로 너머에 조그마한 야산이 있었는데 당시 이곳에는 백설표 설탕을 선전하는 커다란 광고탑이 있었다. 총알은 이 광고탑 부근에서 날아왔다. 약 50~60여 명의 시민군들이 이 광고탑을 주위로 하여 교도소를 향해 사격을 가해 왔으며 그것은 우리 대대 정면 방향이었다. 우리는 이 고지를「설탕고지」라고 이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대대장은 1개 지역대를 선정했고, 지역대장 중 가장 고참이 근무하던 6지역대가 선발대로 시민군과 교전을 하게 됐다. 당시는「설탕고지 탈환작전」인 셈이다.

약 1시간에 걸친 부대의 진격 끝에 이 고지는 우리가 점령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교도소 옥탑 양쪽에 설치된 M-60 기관총에의 지원 사격 때문이었다. 이때 시민군 사상자들이 얼마나 됐는지 필자는 알 수 없다.

설탕고지를 진압한 6지역대가 임무교대를 위해 철수하고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이번에는 군용트럭 1대가 교도소 정문을 향하여 맹렬하게 질주하며 달려들었다. 교도소 옥탑에 설치된 M-60 기관총에서 실탄을 차량에 퍼부었다.

시민군이 몰고 온 군용차량은 총알 구멍을 무수히 낸 채 멈추어 섰고 그 위에서 4명이 뛰어내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중 1명은 저격병에 의해 죽었고 나머지 3명은 포복으로 끝내 인가 쪽으로 기어서 도망가 버렸다.(이 무렵 트럭을 타고 지나던 민간인이 총격을 받아 한 명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곧이어 그 트럭을 견인해 왔는데 거기엔 놀랍게도 다이너마이트 2상자와 수류탄 4~5개가 실려 있었다. 만약 이것이 폭발했다면 교도소 정문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그 다음날인 23일도 몇 번의 교전이 더 있었으나 차츰 시민군의 공격은 약화되어 갔고 교전도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4일 12시 30분께 20사단 62연대와 교도소 방어작전에 관한 인수 인계가 이루어져 우리는 그들이 타고 온 차량으로 광주 송정리 비행장으로 향했다. 광주 비행장에 도착한 날부터 우리는 전략특전부대로서 북한지역 침투에 대비한 도상훈련을 계속했다.

월간조선 1996년 3월호에 보도된 SBS 방송의 李成雨씨 증언 내용은 이 송정리 비행장 모습과 흡사했다. 李씨는『새벽에 성남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흰 천을 덮은 시체를 보았다. 수십 구는 됐을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당시 우리가 송정리 비행장의 한 격납고에 숙식하고 있을 무렵 인접 격납고에서는 11여단 병력들이 숙식을 하고 있었다. 11여단의 경우 광주외각 철수 작전을 하면서 전교사 병력들로부터 오인사격을 받아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던 부대였다. 이 사건으로 인한 희생자들을 공수하기 위해 약 15개 정도의 관을 하얀 천으로 덮은 다음 11 공수단 대원들의 조총 사열 속에 수송기로 관을 날랐다.

이 장례행사는 늦은 오후에 진행됐고 당시 송정리 비행장 격납고에 주둔하고 있던 이성우씨의 부대도 이 광경을 멀찌감치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 장면을 본 뒤 정신과 의사의 설명처럼 혼동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여단은 1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는데 이 또한 같은 과정을 거쳐 C-123 수송기로 수송했었다.

그리고 사흘 후인 5월27일 우리 여단에서는 11대대 1지역대가 참여한 도청 탈환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때 상황은 동료 부대원에게 전해들었으며 필자는 어느 작전도 참여하지 않았기에 기술할 수 없다. 단지 지금까지 본인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약 15년 전의 기억으로 비교적 정확한 내용만 기술한 것이다.

필자는 제대한 이후 대학과 대학원 생활을 마쳤다. 1980년대의 대학가는 광주사태의 피해자 입장을 반영하던 곳이었다. 나는 그들의 입장에 설 수 있는 기회도 가져 보았다. 그들이 주장하는 자료도 가능한 많이 보았다. 그러나 양쪽의 주장을 합쳐 보면 사진이 되질 않는다.

공수부대의 행적은 사진을 찢어 놓은 것과 비슷했다. 잘만 맞추면 전쟁 사진과 비슷한 모습이 결합되어 나온다. 그런데 광주 시민쪽은 아무래도 사실적인 사진이 되기엔 부족하다. 피해자들은 속출하고 있지만 그 많던 조직적인 대항은 여간해서는 찾을 수 없다. 한쪽은 사진이고 다른 한쪽은 만화같다는 느낌이다. 우리가 허상과 싸웠던 것일까.

더구나 당시 열흘간의 전투에서 우리가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이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느낌이다. 1980년 5월 27일 이후 16년이 다 되는 지금까지 우리는 선무공작에 져온 셈이다. 처음엔 광주시민들이, 그 다음엔 전국의 대학생들이, 그리고는 고등학생과 일반인들이 가세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검찰과 대통령조차 이 사안을 이용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필자는 누가 뭐라 해도 열흘간의 사태는 민주화 항쟁이 아니라 전쟁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미 치유될 수 없는 상태로 변해버린 1980년도의 역사 속에 필자는 장본인 중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을 개인적으로 잘못 해석했다면 필자도 李成雨씨처럼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가 됐을지도 모른다. 나는 제대하고 복학한 다음 광주의 망월동 묘지를 찾아간 적이 있다. 나름대로 나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모색이었고 인간으로서 그것은 최선의 길이라 생각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공수부대 요원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동일한 자세를 갖고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공수부대 출신들에게 더 안스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 세상이 균형을 잃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상처는 꿰매야 한다. 그래야 새 살이 돋아나 더 건강하게 자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처가 더욱 곪아 간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杞憂이기를 바랄 뿐이다.


자료정리(2017-04-05)
대한해외참전전우회 창원시지회 사무국장
겸. 보훈지킴이 창원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