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북한운동연합
 
지금도 잠만 들면 악몽에 시달린다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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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보위부 지하감방과 요덕수용소에서 겪은 참혹한 고통

식사는 완전 쓰레기를 갖다 주었는데, 보위부원들이 먹다가 남는 퇴식물(잔반)을 줬다. 지하감방에는 간수도 없어서 제대로 주지 않고 이틀에 한 번 줄 때도 있었다. 한번은 열이 심하게 나서 형편없었는데 봐주지도 않았다.

- 김광수(가명), 1963년생
- 회령시 보위부 지하감방('99.7~'00.4)
- 요덕군 제15호 관리소('00.4~'03.4)
- 2003년 4월 탈북, 2004년 4월 입국

나는 중국 연길에서 태어났지만 7살 때 가족이 북한으로 이주하면서 회령에서 살게 되었다.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요덕 15호 수용소에서 3년을 살게 되어 북한에서 마지막 거주지가 함경남도 요덕군 구읍리로 되어있다. 강제주거지 이동으로 요덕 수용소로 이송되면서 거주증을 수용소로 떼어갔다. 3년 형을 선고 받은 후 3년 형 만기 후에 나왔다.

회령시 보위부 수감생활

처음 체포된 것이 1999년 7월 회령에서였다. 술을 마시고 집에서 잠깐 자고 있었는데 보위원들이 집에 들이닥쳐 알아볼게 있으니 잠시 같이 가자고 했다. 도망갔어야 했는데 큰 죄 지은 게 없으니 따라갔다가 회령시 보위부로 끌려갔다. 바로 지하감방에 보내져 1주일간 감금되었다. 1주일 후부터 조사가 시작됐는데 보위부원 2명이 들어와서 조사를 시작했다. 당시 조사관이 회령시 옥산공장 보위부장 지용수였는데, 9개월 동안이나 모질게 고문했다. 나에 대해서는 회령시 보위부가 아닌 상급기관인 함경도 보위부에서 나와서 취급했다.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장으로 있던 윤창주와 최상수라는 사람이 기억난다. 이들은 김정일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충성심을 발휘하려고 일을 벌인다. 최상수는 중국으로 탈출한 국군포로를 잡아서 납치해 북한으로 송환한 인물이기도 했다.

내가 끌려간 곳은 회령시 보위부 지하감방이었다. 처음 들어가서 오승오 각자(5cm×5cm 굵기 나무 몽둥이)로 몸을 마구 두들겨 맞았다. 내가 부인을 해서 2시간 동안 맞았는데 뒤통수를 한번 맞아서 뒤통수 부위가 깨졌다. 지금도 머리에는 세 군데에 상처가 있다. 각목으로 때려 여기 저기 피가 터지자 무릎을 굽히고 손을 뒤로 얹고 앉게 한 다음 발뒤꿈치로 허벅지를 내려찍었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치아가 몽땅 부러져서 4년간 이 없이 살아야했다. 북한에서 치료를 받지 못해 나중에 중국에 나와서 거의 5년 만에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보위부에서는 계속 맞고 조사받고, 맞고 조사받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잠 안 재우고 하는 가혹행위 중에 ‘비둘기 고문’이라 것이 있는데 손을 뒤로 묶고 쇠창살에 수갑을 채워놓는데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하루가 지나면 어깨 근육이 굳고 가슴뼈가 새가슴처럼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몸 전체가 굳어버린다.

보위부 지상에도 감옥이 있지만 그곳은 주로 잡혀온 탈북자들이 들어가는 곳이고, 간첩죄 혐의자나 정치범들은 지하감방에 넣는다. 지하감방에는 간수도 없었다. 가두어 두고 살면 살고 죽으면 죽으라는 식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테니 죽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묶여 있으면 점점 감각이 없어져 온 몸이 마비되지만 그래도 똥오줌은 나온다. 하지만 화장실도 안보내주니 똥오줌도 그냥 바지에 질질 쌀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있었던 지하감방은 아무리 소리치고 비명을 질러도 위에서는 들리지도 않아 다른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2명이 지하감방에 갇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죽고 나만 살아남았다.

하루는 너무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서 조사관들에게 “배가 고프니까 뭐 좀 먹고 나면 사실대로 다 말하겠다”고 했더니 먹을 것을 많이 가져다주었다. 다 먹고 난 다음에는 간첩행위를 부인해버렸더니 더 심하게 맞았다. 내가 체포되었을 때 75kg이었는데 조사를 받으면서 38kg으로 몸무게가 줄었다.

나는 절대로 간첩질을 한 적이 없었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이 맞다보니 그냥 인정해버렸다. 보위원들은 “너는 보위부에서 절대 살아서 못나간다. 인정하지 않으면 죽어서 나가게 될 것”라고 이야기했다. 또 육체적으로도 많이 힘들어서 “이렇게 살다가 이제 죽는가보다”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나중에는 내가 약해지니까 죽을까봐 때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목숨이라도 부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죄를 모두 인정해 버렸다.

마지막에 보위부 검사장이 와서 조사를 했다. 검사 동지에게 너무 맞다보니 없는 죄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억울하다고 했더니 나를 조사했던 조사관이 달려와서 “너 똑바로 대답 안 해?”하면서 또 다시 마구 때렸다. 중앙재판부에서 내려온 검사의 역할은 죄를 확인해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검사가 보위부로 내려오면 보위부 조사관들이 검사들에게 허위조사를 한 적이 없으니 잘 봐달라고 부탁을 미리 해두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가 않는다.

식사는 완전 쓰레기를 갖다 주었는데, 보위부원들이 먹다가 남는 퇴식물(잔반)을 줬다. 지하감방에는 간수도 없어서 제대로 주지 않고 이틀에 한 번 줄 때도 있었다. 한번은 열이 심하게 나서 형편없었는데 봐주지도 않았다. 방 안에는 이불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옷도 한 번 갈아입지 못했다. 내가 7월에 끌려갔는데 한겨울에도 잡혔을 때 입고 있던 여름 남방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때 얼마나 억울했는지 지금도 치가 떨린다. 회령시 보위부 지하감방에서 죄를 다 인정한 다음에는 재판이나 다른 어떤 절차도 없었다. 지하감방에서 풀려나 일반감옥으로 올라오니 이불짐 같은 보따리만 하나 있었다. 가만 보니 내가 집에서 덮던 이불이었다. 우리 집에 가서 이불을 갖고 온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히 마지막엔 도보위부에 있었던 친구의 도움을 얻어 죽진 않고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2000년 4월 요덕수용소로 보내져 또 다시 3년 동안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요덕 수용소에서의 강제노동

요덕 수용소에 들어가면 외래(신입)작업반이 있는데, 일반적인 질서와 관리 내용에 대해서 1개월간 교육을 받는다. 교육내용은 하루 일과와 하루 작업량에 대한 것이었다.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배급이 없다. 하루 노동량은 1인 기준으로 350평 밭에 김을 매는 것인데, 노동량을 다 채우면 하루 기준으로 1인 600g의 배급량이 지급되고, 350평 중 반 절만 채우면 배급량의 반량인 하루 300g의 식량이 배급된다.

350평을 기준으로 하루 작업 분량에 따라서 1일 600g을 기준으로 차등 배급한다. 작업량이 적으면 배급이 안 나가는 경우도 있다. 1달간 외래반에서 작업을 하면서 교육을 받는데, 한마디로 적응시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숙소가 따로 있는데 정상적으로 1개월에 30명 정도가 외래반(신입)으로 들어온다.

주로 잡혀온 사람들은 북한에서 큰 사건에 연관된 사람들이나 체제비판 유학생이나 말반동, 유학생 사건(주로 독일 유학생 - 이전에 유학 갔던 사람들로 주로 전철우 동기들이 현직(인민무력부 정찰국 등)에 있다가 다 잡혀옴, 또는 중국 유학생)등 주로 정치범들이었다.

1달간 외래반에 있다가 작업반에 배치되는데, 일반적으로 보위부원들이 구타를 하거나 폭행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직책이나 책임자(반장이나 조장)로 있을 때 잘못을 하면 구타를 당하는 경우는 있다. 집중적으로 마구 때리는 경우는 없었다.

수용소에서는 때리지 않고도 수감자를 죽이는 방법이 있는데, 주로 굶겨서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인다. 누구를 죽이려면 일을 하기 힘든 밭에 보내서 김을 매는 일등 어려운 일을 시켜,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게 해서 배급을 주지 않는다. 배급량이 줄어들면 체력이 약해지고, 힘든 일을 계속 하니 힘이 계속 떨어져 체력저하로 죽는 경우가 많다. 보통, 보름을 못 가서 죽는다. 그 것은 허약으로 죽은 것이지 맞아서 죽은 것이 아니고, 사유가 명백하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다. 철저한 약육강식으로 아버지가 아들 밥을 빼앗아 먹는 곳이 요덕 수용소다.

사람이 죽으면 널빤지로 관을 대충 짜서 그냥 묻는데, 묻힌 곳을 평평하게 하고 팻말도 없어서 1년이 지나면 누가 묻혔는지, 그 곳이 묘지였는지도 모르게 된다. 한번은 냇가(하천) 옆에다가 관을 묻었는데 장마철에 파리가 꼬였다. 수용자들을 시키니까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거라 대충 묻었기 때문이다.

2003년 4월 30일 북한을 탈출해 2004년 4월 22일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 와서도 수용소에 잡혀간 꿈과 악몽을 자주 꾼다. 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도 잘 오지 않는다. 잠만 자면 또 잡혀가는 꿈꾸는데, 꿈속에서 보는 것이나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가 친다.

2007년 4월 26일 김광수

자료제공 : 북한인권시민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