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북한운동연합
 
희망을 안고 신념의 노를 저어 독재체제 탈출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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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수기

어린시절 남한삐라를 받아보며 남한에 대한 동경심 가져
 
나는 황해남도 연안군의 작은 어촌마을에서 4남1녀중 막내로 태어나 어린시절을 38선 표지판이 바라보이고 군사분계선 철조망으로 가로막힌 마을에서 자라면서 대한민국에서 보내오는 삐라를 많이 보았다.

그때는 70년대 말이었는데 조국의 하늘을 지켜야 할 비행사들이 훈련도중 비행기를 타고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는 것을 삐라를 통해 알게 되었고 그들이 자유세계의 품에 안겨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남조선에 대한 동경심이 자리 잡게 되었다.

간조시간이 되어 서해바다물이 빠져나가면 수문 밑으로 몰래 기어들어가 한국에서 떠내려오는 희귀한 장난감들을 주어다 놀기도 했다.

집안사정으로 대학포기 하고 인민군에 입대
 
나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총명하고 글 쓰는 재주가 남달라 소학교 시절에 “쌍둥이 굴뚝” 이라는 제목으로 동시를 써서 전국 아동문학공모전에서 당선 되여 평양견학 15일과 기념품을 받았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해주사범대학에 추천을 받았으나 12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나로서는 대학비용을 감당 할 수가 없어 두 형님의 뒤를 따라 조선인민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나는 조선인민군 공군사령부 반항공미사일 여단에 배속되어 여단직속 화학소대 정찰수로 5년, 여단직속 3방송(유선방송)중계수로 3년, 미사일대대 직속 경비 부소대장 상사로 2년, 이렇게 10년이라는 긴 세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사수하자!”라는 구호를 높이 들고 군복무를 열심히 했다.

그런 대가로 자유독립훈장 2급, 군공메달, 군사복무영예메달을 받았으며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군복무기간 북한체제에 환멸을 느끼다
 
내가 북한사회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부대에서 중계수로 근무하던 시절부터였다. 내가 군대에 입대해서부터 써오고 인민군출판사 군사문학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쓴 작품들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보관해오던 내 삶의 전부와도 같은 소중한 작품집을 상관이 제 마음대로 없앤 그 때부터였다.

여단 3방송 실장 김모 대위는 3방송근무에는 충실하지 않고 쓸데없는 글만 써가지고 다닌다며 내가 중계실을 비운 틈에 한 보따리나 되던 작품집을 모두 없애 버렸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그는 여단 대열과장과 여단정치부장에게 고발하여 나를 미사일대대로 강등시켰다.

군복무 10년 동안 단 한번의 휴가도 없이 청춘도 생명도 희망도 깡그리 바쳐가며 조국보위에 충실하고자 노력했고,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 잊을 수 없는 병사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가슴깊이 간직하고자 시를 쓰고 소설을 쓴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어머님을 잃은 상처 때문에 늘 마음 한구석이 어두웠던 그 시절 글쓰기를 위안삼아 아픈 마음을 달래보자 한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그렇게 사랑하고 몸의 한 부분처럼 여겨오던 작품집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나는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과 같은 공허감과 값진 재부를 잃은 듯 한 허탈감에 빠져들었다.나는 혁명화 기간인 미사일대대 직속 경비소대에서 보초근무를 서는 나날에 정말 많은 생각을 했지만 이를 악물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소대와 대대의 추천을 받아 2달 만에 다시 자기 위치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글쓰기도 싫어졌으며 창작적영감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잘못된 사회에서 태여 나고 잘못된 체제에서 살아가는데 대한 환멸감 나의 문학적 재능을 무참히 짓밟는 군사통치 집단에 대한 반감만이 나의 가슴속에 응어리져 굳게 자리 잡게 되었다.

10년만에 밟은 고향 땅
 
내가 만기군사복무를 끝마치고 드디어 10년 만에 정든 고향땅을 찾았으나 아무도 나를 반겨 맞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제대 1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나 1기 전투정치훈련기간이라고 부대 참모부에서 시간을 내주지 않아 아버님 영전에 찾아가 술 한잔 부어 올리지 못했다. 그나마 고향에 살고 있던 친형과 양 어머니가 10년만에 다시 돌아온 나를 성의껏 대접해 주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 부모님의 영전을 찾아 쌓이고 쌓인 슬픔과 그리움으로 축적된 눈물인양 술을 부으며 쓰리고 아픈 마음을 달래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안 계시는 고향마을에 살고 싶지 않아 고향마을 어르신들과 학교 동창생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남기고 서해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는 평안남도의 어느 한 외화벌이사업소에 취직했다.

라디오를 들으며 탈북의 꿈 키우다. 그리고 두번의 탈북실패

외화벌이 사업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KBS라디오 방송을 틈틈이 청취했다. 또 “약속” “나 홀로 집에” “미녀 삼총사” 등 한국영화와 드라마 CD를 몰래 시청하며 대한민국에 대한 동경심에 젖었고, 글로벌시대에 맞게 세계선진국과 어깨를 겨루고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고 있는 대한민국으로의 탈북이 하루빨리 이루어질 그날이 오기만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탈북루트를 찾지 못해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그러다 한번은 KBS라디오방송을 듣고 몇년전 평안북도 정주시에 살고 있던 부자(父子)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해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로의 귀순에 성공하여 한국정부에서 배려해준 임대아파트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으며 아들은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신의주 수출수산사업소에 출장을 갔다가 압록강을 건너려고 시도했지만 강이 얼지 않아 포기했었다. 또 작년 5월에는 자강도 만포시에서 압록강을 건너려고 강에 뛰어들었으나 물살이 빠르고 너무 깊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 적도 있었다.

반복되는 북한의 비극적인 참상 목격 

두 번의 실패 후 압록강으로의 탈북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계속 라디오를 들으면서 새로운 탈북루트를 찾았다. 그러던 중 라디오를 통해 올해 3월 이명박 대통령이 ‘비핵개방3000’의 대북정책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제야 살길이 열리는구나.” 라고 속으로 환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김정일은 자본주의 황색바람의 유입을 우려해 이 제안을 거부했다. 김정일은 이 제안을 “흡수 통일론”이니 “동독식 붕괴론”이니 하면서 민족의 선의와 진심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악담을 퍼붓고 있으니 이야말로 웃지 못 할 희비극이 아니겠는가?

기아와 빈궁의 늪에서 허덕이는 2천만 인민을 위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진 지도자라면 이 제안을 조건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사실 북한의 상황은 뉴스에 소개되고 영화“크로싱”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비참하고 참혹하다. 내가 직접 목격한 사실이지만 자강도 시중군 이남리 8반의 50대 남성 이모씨는 몇 년 전 겨울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가족을 남겨둔 채 부엌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다.

2006년 8월 평안남도 대안군 월매리 과수반의 40대 남성 김모씨는 굶주리는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한 처지를 비관하며 고민하다가 “누바크론”이라는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또한 2008년 2월 남포시 도지리 통신기계공장의 김모씨 일가족은 먹을 것이 떨어지자 가산의 전부인 늄 가마를 시장에 내다 팔아 마련한 돈으로 한끼 “인간다운 식사”를 한 후 중국산 수면제(북한에서는 일면 ‘행복의 약’이라고 함)를 먹고 온 가족이 동반자살 했다.

더는 독재자의 노예로 살 수 없어 목숨을 건 해상탈출 감행

나는 북한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비참한 현상들을 보면서 더는 김정일 독재정권의 희생물로 인민위에 군림하는 김정일의 노예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올해 6월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으로의 탈출을 시도했다.

우선 고기잡이를 구실로 북한 돈 10만원을 들여 작은 배 한척을 마련했다. 6월 13일 저녁 나는 어로작업을 하는 척 하다가 배를 타고 북한 땅을 탈출하여 북방한계선 NLL을 넘었다.

남쪽을 향해 28시간 노를 저어 오면서 지칠대로 지쳐 포기하려고 할 때 다행히 중국어선을 만나 선장님의 도움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게 되었으며 백령도로 가는 뱃길과 식료품, 음료수까지 제공받아 꺼져가던 생명이 은혜를 입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새벽기도 할 때마다 내 생명의 은인인 중국 선장님의 건강과 그 분의 모든 사업이 성공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몇 시간 후 나는 백령도 부근에서 대한민국 해군경비정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들의 안내를 받아 대한민국에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다.

나는 기아와 빈궁의 질곡 속에서 갈길 몰라 방황하던 나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어주고 신념의 노를 저어 서해바다를 헤쳐올수 있게 해준 대한민국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비록 언어의 장애와 문화의 차이, 낯선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잘 안될지라도 어떤 역경도 극복하고 이겨 낼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끊임없이 도전할 때 성공의 문은 열리고야 만다는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할 때 안 되는 일은 없으며 반드시 쨍 하고 해 뜰 날은 돌아올 것이다.

언제나 작은 것에도 감사함을 느낄 줄 아는 것이 중요하며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며 우리 곁에는 늘 좋은 만남이 이루어 질것이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작은 것에도 늘 감사함을 느낄 때 하나님은 가진 것 없는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늘 충만감을 갖게 할 것이다.

나는 북한의 민주화를 이룩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고향에 돌아가 고향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가 되려는 희망을 안고 살고 있다. 

2008년 12월 22일 탈북자 박신혁